릴레이 인터뷰-14.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6년전 여름 ‘인천시사 편찬’이라는 임무를 띠고 인천에 왔다.

줄곧 역사연구에 파묻혀 연구자로 내달은 끝에 다다른 지점이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도시에서 지난 시간의 흔적을 읽어내려 열정을 쏟아 붓는다.

인천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이를 바탕으로 결과물을 엮어냈다.

한권 한권씩 묶은 것이 어느덧 23권. 올해말에도 여덟권을 또 낼 것이다.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의 일하는 모습은 철인을 닮았다.

▲인천시사편찬 위원으로 오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12년동안 줄곧 책에 묻혀 살았어요. 졸업후엔 당연히 학문연구로 방향을 잡았죠. 우연히 인천시사 편찬위원을 뽑는 인터넷 공고를 본겁니다. 순간 ‘내가 할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천은 한없이 낯선 곳이었다.

홀린 듯 일에 이끌려 온다.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야말로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다보니 박사학위를 얻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나마 동료들보단 빠른 편이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는 여러 대학 강사로 뛰어다니며 눈코 뜰 새없이 바쁘게 살았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학위를 딴후 국사편찬위원회 프로젝트 연구위원으로 1년을 지내기까지 늘 하던대로 공부의 연장이었습니다.”

일찌감치 갈 길을 대학에서 연구자로 정했다.

그런데 교수채용 마지막 단계에서 잇달아 물을 먹는다.

“그 사회가 의외로 보수적이에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학연과 지연이 끈끈하게 연결돼 있어요. 뛰어넘는 것이 나에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천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를 선택해 주었다.

“단지 내 실력을 믿고 뽑아 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보답은 인천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 마음을 다졌어요.”

공채로 두명을 선발했다.

지금까지 단짝으로 지내고 있는 강덕우 전문위원과 그렇게 연을 맺었다.

시사를 묶어내야하는 시한은 2002년 12월. 2년6개월이 주어진 셈이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는 지난 1963년 출범했다. 이후 1973년, 1983년, 1993년을 기점으로 세차례 인천시사가 만들어졌다.

그가 집중해야 할 연대가 1993년 이후 10년에 해당한다.

“제가 오기 6개월전 위원회가 다시 출범한 상태였어요. 김양수 상임위원을 중심으로 목차에 대한 얼개를 엮어놓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채워야 하는 것이 제 몫이죠.”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녔다.

정보가 있을 만한 곳은 어디든 가서 몇날 며칠 검색해 얻은 자료들을 싸들고 왔다.

“물불 안가리고 일만 했습니다. 요령부득이었죠. 강덕우 박사가 인천 출신이다보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자료에 집착한 이유가 있다.

10년간 시사를 묶으려 하니 그동안 축적된 것이 전무했다.

10년 단위로 3년 연구해 책을 묶은 후 위원회가 수면아래로 들어갔다가 다시 가동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전임 연구위원이 모아놓은 자료를 차기 위원들이 넘겨받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제가 맡은 시기 시사를 완성하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향후를 준비하기 위해 인천 관련 자료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 사명감처럼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6권으로 묶었다.

이례적으로 책 내용을 담은 CD도 냈다.

시연회 자리에서 일부에 대한 시민단체의 지적을 받긴했으나 쏟아부은 노력의 무게와 부피는 자부할 수 있었다.

▲인천시역사자료관서 다시 시작

“2002년 12월을 시점으로 시사편찬위원 역할은 종료됐습니다. 한시 계약직이므로 이제 떠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둘이 모은 자료가 상당했습니다. 이들을 분류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다시금 발목을 잡았습니다.”

인천시에서도 공감은 했으나 인원 충원이 행정자치부 심의를 받아야하는 사항이었으므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목마른 사람이 찾아야지요. 자유공원 옛 시장공관을 인천시역사자료관으로 꾸며 시사편찬 위원들이 머물러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곳을 역사문화연구실로 활용하고 싶다는 제안서를 행자부에 올렸습니다.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문제가 발생했다.

정원 6명 신청에 2명 승인은 그렇다 치고, 직급이 각각 계약직 나급(공무원 6급), 라급(8~9급)이었다.

“시사편찬위원으로 올 때 계약직 나급을 받았지요. 이십년 가까이 공부해 쌓은 것에 대한 처우가 참으로 박하다는 마음을 꾹꾹 묻으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참이나 못미친 대우를 받으며 다시 일해야 하나 고민이 됐습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이번에도 일이었다.

“둘 중 한사람이 혼자서 짊어질 수도 없다. 라급이면 어떤가. 예서 놓을 순 없는 것이다. 선택을 했습니다.”

▲역사문화총서를 내다

언제까지 서운함을 갖고 지낼 수만은 없었다.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시사 6권을 축약, ‘인천의 역사와 문화’라는 표제로 단행본을 냈다.

내친김에 영어, 중국어, 일어판도 만들었다.

모은 자료중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실린 인천 기록을 모아 ‘인천사 자료집 1’ 을 펴냈다.

2003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별반 주목하지 않던 시가 이듬해 예산을 내려준다.

체계적인 발간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인천역사문화총서’ 발간에 나섰습니다. 내고향 탐방시리즈부터 인천역사를 들여다볼수 있는 학술 논문, 일본문서 번역본, 인천부읍지와 군지 번역서, 학술대회 묶음집, 특정시기 인천자료집에 이르기까지 카테고리를 나눴습니다.”

부문별 집필자를 물색했다.

40여명에 달했다.

이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방향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1년 고생끝에 그해 말 9권의 총서를 완성한다.

“인천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 일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이 있어 가능했지요. 지칠 때마다 문화를 함께 일구어간다는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지난해에도 패턴은 같다.

큰틀 세우는 일은 덜었으나 채워야 할 내용을 찾아내는 일은 다시 시작이다.

욕심이 더 생겼다. 향토사 강좌를 연 것이다.

인천의 향토사학자를 초청, 두달에 한번꼴 종일 수업 방식으로 운영했다.

“자료집을 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다른 형태의 인천알기 프로그램을 주자는 고민끝에 열었는데 호응이 컸습니다.”

올해도 총서 발간은 진행중이다.

‘인천의 섬’ ‘인천의 산과 하천’에 이은 내고장 탐방 시리즈 3편은 ‘인천의 길과 시장’이다.

“9월 학술대회에서는 이민을 주제로 하와이, 멕시코를 다뤘습니다.

‘근대 이민과 인천’ ‘멕시코 이민 100년의 회상’이 그 결과물이지요. 올해에는 동북아 이민입니다. 러시아로 간 고려인과 재일 동포의 삶을 짚을 예정입니다.”

사진전도 준비중이다. 주제는 광고를 통해본 근대 인천이다.

“일본 서적 번역을 하면서 자료를 찾다 발견한 그 시대 광고사진이 100장정도 돼요. 역사자료관 뜰에서 소박하게 열겁니다.”

▲“자료수집이 가장 중요”

줄곧 달려온 세월이 꽉 채운 6년이다.

하루하루 인천에 대한 애정을 쌓은 시간들이다.

인천 정체성에 대해 묻자 정색을 한다.

“아직 축적된 자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인천이 어떤 도시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하죠. 예컨데 제1 도크 모습도 제대로 모르면서 항구도시가 어떻다고 말하는 식이죠. 더 많이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숙제가 많다.

“일을 풀어가는 진도는 내가 만들어요. 휴일은 의미 없죠. 자료를 받는 이들이 건네는 고맙다는 말은 언제나 나를 충전시킵니다.” 모든 시간을 일에 쏟는 모습이 진정한 연구자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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