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한 곳은 바로 동남아시아이다.

지금도 전체 화교의 80%가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고, 또 그들이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남아시아가 화교들이 살기 편한 곳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런 험난한 길을 이기고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낸 화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동남아시아 화교들이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화교로 인도네시아의 린샤오랑과 말레이시아의 궈허녠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화교는 전체인구의 약 4%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화교들의 경제 규모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약 80%를 차지한다.

이러한 화교기업들 중 독보적인 존재는 바로 린샤오랑의 사림 그룹이었다.

징병을 피해 인도네시아로 간 린샤오랑은 식료품, 의약품, 의류 등의 장사로 어렵게 시작했다.

그는 장사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선 수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전한 수송을 위해서는 군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린샤오랑은 군에 의약품과 식량을 제공하고 안전한 수송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친해진 사람이 바로 후에 32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을 지낸 수하르토였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식으로 개명시키고, 중국어 교육을 금지시키는 등의 반화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린샤오랑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다. 특히 밀가루와 정향의 독점은 사림그룹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린샤오랑은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멘트 회사를 건립하고, 사림그룹을 홍콩 금융회사를 인수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인도네시아의 화교 수난 시대에도 린샤오랑은 오히려 상권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8년 금융위기와 함께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자 연간 매출이 200억달러에 달하던 사림그룹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60억 달러에 달하던 동남아시아 최대 부호의 재산은 하루아침에 10억 달러 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화교 궈허녠은 ‘설탕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속에서 설탕 제조로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초기에 궈허녠은 형제들과 회사를 차려 쌀, 밀가루, 설탕 등을 유통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설탕의 소비가 증가하자 사탕수수의 생산과 설탕 제조로 방향을 전환하여 국제적인 설탕교역에 나섰다.

설탕으로 기반을 다진 궈허녠은 밀가루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궈허녠의 밀가루 공장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말레이시아 밀가루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 궈허녠을 대표하는 기업은 바로 샹그리라 그룹(Shangri-la Group)이다.

샹그리라 그룹은 아시아 최고급 호텔 체인이다. 1967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주요도시와 중국의 주요도시에 샹그리라 호텔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13개 상장 계열사 거느린 ‘철강왕’

중팅썬(鍾廷森)

말레이시아에 ‘왕’인 화교는 ‘설탕왕’ 궈허녠(郭鶴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왕은 바로 ‘철강왕’ 중팅썬이다.

중팅썬의 진스(金獅)그룹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철강, 식목, 부동산, 백화점, 자동차 산업,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5만명에 달하는 직원을 거느린 거대 그룹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철강이다. 지금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13개 상장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지금의 진스 그룹을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철강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철강 산업으로 이름을 떨친 중팅썬은 ‘동남아 철강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팅썬은 말레이시아 화교이지만 원래는 싱가포르 출신이다. 중팅썬은 돈 벌 기회를 찾아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부친을 따라 말레이시아로 가 말레이시아 국적을 얻었다.

그의 부친은 철제가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중팅썬이 철강 산업을 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이다.

말레이시아로 넘어간 중팅썬의 부친은 철제가구를 비롯해 고무, 식품 가공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중팅썬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이다. 중팅썬은 그의 부친의 사업과는 달리 국제적인 경영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중팅썬은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철제금고나 선반 등을 만드는 금속 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5년 동안 흑자를 낸 중팅썬은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철강공장을 세웠다. 이탈리아 철강회사와의 제휴로 높은 수준의 설비를 갖춘 진스합영철강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큐모였다.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의 사업까지 합쳐 진스유한공사로 이름을 바꾸고 1983년 연 생산량이 85만t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중팅썬은 철강 사업이 뿌리를 내리자 부동산, 식목사업에 뛰어들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으면 어느 한 쪽도 잡지 못한다고 하지만 중팅썬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부동산 사업은 말레이시아 5대 건설 업체로 말레이시아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와 중국 등지의 건설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또 식목 사업은 목재 가구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8만㎢ 이상의 종묘장을 확보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단시간에 다양한 사업을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그는 또다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5년에 불경기로 백화점들이 도산하자 백화점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백화점 사업을 키워 바이성 백화점(島第一百盛)을 세웠다. 이 백화점 사업의 성장은 철강에 이어 진스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발전할 정도로 컸다.

이미 중국 각지에서 쇼핑명소로 자리잡았으며 진스 그룹은 중국에서 백화점을 1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또 오토바이, 자동차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이 밖에도 타이어제조, 제지업, 방범회사 등 계속해서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고 있다.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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