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재부(財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모두 사회에 돌려줘야 하는 데엔 예외가 없다. 돈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이 글은 2008년 10월15일 왕융칭(王永慶)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글이다. 이 유언과 함께 사회에 환원한 돈은 무려 9조원에 달했다.

경영의 신(神)이라 불리던 그는 30개 계열사에 9만명 임직원을 두고 연매출 617억달러(2007년·62조원)를 올리는 대만 최대 기업 ‘포모사그룹’의 창업자다. 왕융칭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라고 자신의 유언에 쓴 것처럼 왕융칭은 대만에서 손꼽히는 부호였지만 그의 시작은 빈손에서부터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왕융칭은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돕다가 열다섯의 나이에 집을 떠나 쌀집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여 그 다음 해에 자신의 가게를 냈다. 왕융칭은 형제들을 동원하여 쌀가게 경영에 매달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사가 잘되었던 것은 아니다. 탈곡작업을 개선하여 쌀의 품질을 높이거나 택배서비스를 하는 등, 왕융칭은 고객확보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다.

왕융칭은 그렇게 정미소도 운영하게 되었다. 정미소가 대만에서 유리한 사업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리한 사업이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은 거의 모든 정미소를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융칭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공만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2차 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대만의 쌀을 정부의 통제아래 두었다. 왕융칭은 정미소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벽돌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 될수록 노동력과 원료 조달이 갈수록 힘들어져 벽돌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이렇게 실패가 계속 되었지만 왕융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다.

“근본을 추구하고 행동을 추구한 후,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그의 생활 철학은 결국 빛을 발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포모사 그룹을 있게 한 플라스틱 산업이다. 왕융칭은 플라스틱에 관해 문외한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또다시 새로운 것에 도전한 것이다.

초기에는 사업이 순탄치 않았다. 판매량이 예상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것이다. 하지만 왕융칭은 오히려 생산량을 늘렸다. 왕융칭의 생각이 맞았다. 생산량이 늘어나자 판매단가가 낮아졌고 판매량이 증가했던 것이다. 플라스틱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왕융칭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사업규모를 늘려갔고, 연매출 617억 달러를 창출하는 거대한 기업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거대한 부를 손에 넣은 왕융칭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양복 한 벌로 20년을 넘게 입었고, 목욕 수건 하나로 30년 동안이나 사용했다. 딸이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면도기 하나 보낸 것은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의 말대로 빈손으로 시작해 재물을 하늘로부터 빌린 듯이 사용하다가 다시 되돌려주고 돌아간 것이다.

대만 플라스틱 산업 양대산맥

쉬원룽(許文龍)

왕융칭이 플라스틱 산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쉬원룽도 플라스틱 산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쉬원룽의 치메이 그룹은 ABS(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 copolymer)수지에 있어서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또 치메이 그룹은 석유화학과 더불어 전자부문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특히 LCD부문에서는 세계 4위의 규모로 대만 LCD제조의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다. 치메이 그룹은 연매출 125억 달러로 세계 10대 화상기업중 하나이다.

대만 플라스틱 산업의 양대 산맥인 왕융칭과 쉬원룽은 대만 출신의 화교이고 어린시절 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며 플라스틱 산업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쉬원룽은 어린 시절 부친의 실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다가 공장에서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일용잡화 및 완구용품을 제조하는 가내공업을 시작했다. 왕융칭과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산업의 전망을 읽어냈던 것이다.

쉬원룽은 생활용품을 플라스틱으로 대체하려는 추세가 계속되고 각종 분야에서 플라스틱의 활용이 증가함에 따라 1959년 치메이 실업을 설립했고 현재의 치메이 그룹으로 성장한 것이다.

특히 견고하고 색감이 뛰어나 가전제품, 자동차 등의 부품으로 자주 사용되는 ABS수지분야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LCD 등의 액정패널분야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배경은 왕융칭과 비슷하지만 쉬원룽의 경영철학은 왕융칭과 전혀 다르다. 왕융칭은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검소와 성실을 엄격하게 지켰다. 또 그 철학은 그의 경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반면 쉬원룽은 회사에는 일주일에 두 번정도 밖에 출근하지 않고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 문화생활을 즐긴다. 어떻게 그렇게 경영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쉬원룽은 실업(實業)과 허업(虛業)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가 설립한 치메이 실업(實業)에서 실업의 반대 개념은 허업(虛業)이다. 뜬 구름을 잡는 듯한 일확천금을 노리지 말고 기본적이고 실질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다. 쉬원룽은 실업이란 말을 회사의 이름에 넣음으로써 사원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쉬원룽은 다른 화교들과도 다른 경영방식을 선보였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꽌시(關係)를 바탕으로 가족중심의 경영진이 회사를 이끌어간다. 물론 쉬원룽의 치메이 실업도 초창기에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쉬원룽은 경영과 소유를 완전히 분리시켜 철저하게 능력위주로 외부에서 사장 및 임원들을 뽑는 방식을 선택했다. 1960년대 당시에는 선진국 기업에서나 채용했던 사외중역제도(社外重役制度)를 채택했던 것이다.

비록 쉬원룽은 2004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룹 창립자로서, 또 전 회장으로서 치메이 그룹에는 그의 영향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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