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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 기질로 다시 ‘용틀임’
한국정부의 각종 규제로 인해 번창했던 한국화교의 무역업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많은 무역회사가 사라지고 많은 화교들이 요식업 등의 새로운 직종을 찾았으며, 혹은 다른 나라로 재 이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교들이 무역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사라진 듯 보인 한국 화교의 무역업은 또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규모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외국인 외환 규제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이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화교들은 개인 단위의 매우 작은 규모의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보따리 장사’다. 1970년대 이후 화교들의 외국여행이 빈번해졌다. 화교들은 국적 상 외국인 이므로 해외여행 규제 정책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교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보따리 장사’의 주 대상은 대만이었다. 화교들은 대만에서 청심환, 거품환, 고약 등의 중국 약품들과 상아, 산호, 옥 등의 보석류와 같은 물품을 구매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또 대만으로 갈 때는 인삼, 버섯, 담요, 옷 등의 상품을 판매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무역이 성행하자 한국, 대만에서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 중개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남대문 시장이나 명동 중국대사관 앞, 인천, 부산 등의 지역에 ‘보따리 상인’에게 물건을 파는 상점이 등장했다. 또 마찬가지로 대만에서도 이와 같은 상점이 생겨났다. 이들 상점 역시 한국 화교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소규모 무역은 1980년대 말까지 성행하였다.


1980년대 이후 대만인의 한국 관광이 빈번해지자 대만인들이 직접 한국 물품을 구매하게 되어 이러한 소규모 무역의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1990년대에 이르자 무역인가를 받는 조건이 완화되고 절차도 간소화 되면서 중소기업도 무역업에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일부 화교도 무역업에 진출하였다. 이제 본인 명의로 무역업을 영위하지 못하던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화교도 조건만 갖추어 지면 무역업 인가를 얻고 무역업에 종사 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화교가 운영하는 무역회사는 15군데 였다.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지자 일부 화교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인 산둥성에 진출하여 한화상공회(韓華商工會)를 조직하기도 하며,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1997년에는 한국의 대규모 무역회사와의 연계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의류를 수출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1990년 말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무역회사가 약 60군데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화교 무역업은 한 때 사라질 위기를 겪었지만 다시 일어나고 있다. 화교들은 최악의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속에서도 때가 오길 기다리며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의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한류·월드컵 바람…“한국가자” 발길

관광업, 토산품 판매업


화교들이 새로이 일어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 직종은 관광업이다. 1989년 해외관광이 개방되면서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이 늘어났다. 특히 1990년 대만에서 한국 관광객에 대해 비자를 면제하고 우리나라도 14일 이내의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외국인이 비자없이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90년 대만 교통부 관광국이 양국 관광 교류 확대를 기대하면서 서울에 대표처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만 관광의 길이 열리자 많은 한국인들이 대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또 대만에서 한국을 찾아오는 관광객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이렇게 대만 관광의 기회가 확대되자 관광여행업이 화교의 새로운 직종으로 부상하였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여행을 주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만의 국어가 중국어였기 때문에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한국 화교들이 하기에 적합한 일이었다. 또 교육과 소규모 무역에서도 그랬듯이 한국 화교들은 대만과 통하는 많은 루트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화교들이 여행을 주선하는 것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반대로 우리나라로 오는 대만인 관광객 유치에도 기여하였다.


이렇게 화교 여행사는 활기를 띄었다. 1991년 화교가 경영하는 여관 및 여행사는 약 14개 였다. 당시 한국을 방문하는 대만 관광객은 매년 20만명 정도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또한 가이드업은 화교 청년들에게 새로운 취업기회를 제공하였다.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초반에 약 300여명이 가이드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92년 우리나라가 대만과 단교하자 대만 관광객들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것은 한국 화교 관광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한류와 2002 월드컵 등을 통해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이 증가했다. 특히 중국 관광객과 동남아시아의 화교 관광객들이 증가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화교가 운영하는 여관 및 여행사는 1994년 14군데에서 1999년에는 42군데로 늘어났다.


관광업이 발달함에 따라 토산품 판매업도 함께 발달하였다. 화교 토산품 판매점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토산품을 판매하였다. 주 판매 품목으로는 버섯, 담요, 수정, 옷감, 수공예품, 인삼, 인삼제품 등의 상품이 있었다. 특히 백삼, 당삼, 홍삼은 전매청 지정 판매점에서만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었다. 1981년에 11개였던 화교 토산품 판매점은 1983년 29개, 1990년 50개로 증가하여, 1995년에는 60여개에 이르렀다. 그 후 불경기와 물가상승 등의 이유로 토산품점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2007년 중국인 관광객이 100만을 돌파하는 등 중국계 관광객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화교 관광업이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면서 토산품 판매업도 다시 활기를 띄게 될 것이다.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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