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인터뷰-13.문상범 인천고등학교 교사

스승은 정진해야 할 학문의 방향을 일깨워주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스승을 따라나섰다.

차츰 민속학에 눈을 뜬다.

인천의 민속학 연구가 상당부분 공백으로 남겨져 있음을 본다.

나고 자란 인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동제(洞祭) 들여다보기다.

“대규모 택지조성으로 도시 곳곳에선 이 순간에도 동제가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동제는 마을단위 주민 공동으로 치르는 제사의식이라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과 밀착돼 있습니다. 또 마을사람이 함께 참여한 대표적인 전통 축제문화이기도 합니다. 이를 지역축제에 접목시킨다면 전통을 살리면서 ‘주민이 함께하는’ 축제 본연의 기능을 일궈낼 수 있습니다.”

인천의 문화활동가로서 부단히 일을 펼치고 있는 문상범 인천고등학교 교사의 동제를 향한 애정이다.

그동안 그가 구석구석 찾아다닌 동네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속 찾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민속에 눈을 뜨다

“군 제대후 복학하면서 김광언 교수를 만났습니다. 나로하여금 민속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주신 스승입니다. 국내 대표적인 민속문화학자가 우리과 교수로 온겁니다.”

농기구와 집 연구에 일가를 이루고 있는 김 교수는 인천이 고향인 그에게 시골 전통집 안내를 부탁했다.

영종의 전통가옥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떠올렸다.

민속에 대한 조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역 답사를 가서 조사하는 작업을 처음 하게됐죠. 이후 줄 곧 교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조 역할을 했습니다. 차츰 민속 물질문화에 대한 인식이 쌓여가더군요.”

대학 4학년이 됐다.

인생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당시 대학측에선 인하대박물관 기능을 확대하려는 계획에 따라 민속박물관장 경력이 있는 김 교수에게 일체의 운영을 맡긴다.

그에게는 박물관 TA조교가 떨어졌다.

“학부생으로 교수님 연구실에 머물면서 일을 돕는 거죠. 1년후 졸업과 동시에 박물관 조교로 뽑혔습니다.”

스승은 교통박물관을 구상했다.

옛날 전통배 모형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전통 기법으로 한선을 만드는 목수를 찾아 서울 밤섬에 가기도 한다. 열심히 다니며 배 만드는 과정을 보고 익혔다.

민속에 관심이 꽂히는 계기가 온다.

인천공항건설을 위한 택지조사를 인하대박물관이 맡게된다.

“현장 개발이 이루어지는 틈에서 사라져가는 민속을 만납니다. 연구자로서 다가가는 겁니다.”

그렇게 1년반을 쫓아다녔다.

스승은 제자에게 인천의 향토연구가가 될 것을 권했다.

“박물관 직원이 아니다 보니 신분이 불안한 지점에 놓여있었습니다. 연구자가 되기위해선 대학원에 진학해야하는데 교육대학원밖에 없는 여건이 망설임을 주었습니다.”

아무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조교를 던지고 나왔다.

길은 하나 있었다.

사범대 출신이므로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사의 길을 가다

“인천사립학교 순위고사가 치러진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사립학교 차원에서 교사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는데, 이후 제도가 아예 없어졌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주어진 시간은 한달이었다.

인천 중앙도서관에서 새벽부터 문닫을 때까지 온종일 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숭덕여자중학교 사회교사로 부임한다.

꿈이 컸다. 열심히 가르쳤다.

“의욕과는 달리 신성한 사학에서 존재해서는 안될 어긋남을 체감하기 시작합니다. 때마침 전교협 열풍이 불어닥쳤어요. 학교마다 전교조를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선봉에 나섰죠.”

그가 중심이 돼 숭덕여중고 전교조를 조직한다.

다른 지역은 상당수가 깨져나가는 데 반해 조직력이 돋보이는 분회로 집중을 받는다.

당연히 교육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다.

“전교조를 나올수 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장인이 인천의 고교 교장이셨어요. 결혼 전제조건이 전교조 탈퇴였습니다.”

교장은 눈엣가시였던 그를 공립학교 전근 대상자로 추천한다.

전교조 활동은 그렇게 정리됐다.

▲인천의 동제 연구

그간에도 스승의 일은 꾸준히 도왔다. 인하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한다.

“졸업논문을 ‘인천의 동제’로 잡았습니다. 대학시절 조사다닌 내용을 정리하자는 의도에서였죠. 이는 후에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총서(2003년)에 개제한 내용의 바탕이 됐습니다.”

도시 변두리 마을은 물론이고 섬 지역도 많이 다녔다.

어느 곳보다 전통문화가 심하게 파괴됨을 본다.

마을축제는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경서동 어느 마을에 가보니 음력 2월초 자정을 기해 동제를 지내더군요. 상을 거하게 차려놓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후 동네 일을 의논했습니다. 대공원 앞 음실마을에서는 여름에 동제를 지냅니다. 그 과정에서 소 한마리를 직접 잡는 것이 특별합니다.”

이들 행사에는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잔치의 형식을 취한다.

뿌리는 전통에 닿아 있다.

국적불명의 축제 홍수속에서 살려내야할 문화인 것이다.

“경서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당제를 지내던 터가 없어져버렸더군요. 그곳에 살던 이들은 모두 떠납니다. 뿌리가 사라진 겁니다. 행정관청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화재 답사로 인천알기

인천의 문화유산에도 애정이 각별한 그다.

지역 곳곳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실행함에 있어 누구보다도 앞서 있다.

해반문화사랑회에 연이 닿아 있다.

“모임 결성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3년쯤 지나 인천 바로알기 프로그램으로 ‘해반문화학교’를 꾸렸는데 제가 맡게됐습니다. 직책이 교장이었어요. 비록 ‘3일교장’이지만요(웃음).”

방학마다 학생들을 모아 답사에 나섰다.

이름이 교장이지, 답사 기획부터 진행에 해설사까지 1인 3역을 했다.

3일 일정으로 꾸렸다. 3일교장이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난해부턴 문화유산지킴이 강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인천지역 근대문화유산 전반을 소개하는 소책자도 만들었다.

해반문화사랑회가 올들어 문화재청 후원을 받아 펼치고 있는 방문교육 ‘교실에서 만나는 인천근대문화유산’의 기반을 준비한 것이다.

“최근들어 인천의 정체성 논의가 곳곳에서 일고 있습니다. 예컨데 ‘자유공원 창조적 복원 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 진행중이죠. 복원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내 아이들이 인천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인천사람들이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 정체성 찾기는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랜세월 체감으로 얻어낸 해법이 명쾌하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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