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중국인=중국집 요리사의 이미지가 자리 잡히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 하면 무엇이 떠올랐을까? 아마도 ‘상인’의 이미지가 아닐까?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이것은 1938년 발표된 김정구씨의 ‘왕서방연가’라는 노래의 첫 구절이다. 이 노래는 중국과 관련된 노래 가운데 가장 인기를 누린 노래이다. 이 노래의 인기 탓인지 아직도 ‘왕서방’이라는 말은 중국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 실제로 ‘상업’은 화교들의 주요한 경제활동이기도 하다. 화교 상인은 ‘화상(華商)’이라고 별도의 명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화교 네트워크 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네트워크는 단연 ‘세계화상대회’인 것이다.

광복 이후 한국 화교들의 경제생활은 대부분 무역업에서 요식업으로 이동했다. 1960년대 한국 화교의 경제력은 거의 요식업에 의존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요식업에 비하면 미비하지만 요식업에 이어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업종은 바로 잡화업이었다. 한국 화교 잡화업은 1960년대에 화교 취업자의 5% 정도를 차지하였다.

1971년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화교 잡화점 중에 연간 매출액이 20만원이 이상인 곳은 800여 곳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화교 잡화점이 소규모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정부 정책 변화로 화교 중국 음식점이 감소하자 잡화업 역시 타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화교 잡화점이 화교 중국음식점을 상대로 영업을 했기 때문이다. 주로 식품, 양념, 주방용구 등을 공급하였다. 따라서 음식업 경기가 잡화업 경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대만이나 홍콩등지에서 중국요리 재료를 구입하여 중국 음식점에 공급하는 경우는 비교적 경기가 좋았다. 일부 자본력을 갖춘 화교 잡화점은 식품공장을 겸업하거나 도소매유통을 하기도 하면서 요식업의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잡화점이 요식업의 직접적인 타격을 받아 사라졌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슈퍼마켓이 저렴한 가격으로 영업을 하자 경쟁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에는 음식재료와 음식점 용품을 공급한 것 이외에도 한국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대만, 홍콩, 중국에서 관련 물품을 조달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소비가 증가하면서 나타난 각종 유형의 상점이 등장하고 현대적인 방식의 경영과 서비스가 향상되었다. 반면 화교 잡화점은 종래의 경영형태를 유지하면서 입지가 점차 좁아졌다.

1990년대 초반에 약 100여 개가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는 26개소로 줄어들어 우리나라내의 화교 잡화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차별 없지만…진출 ‘좁은 문’

한의약업

광복 이후 더 이상 무역업이 한국 화교들의 경제력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의 화교들은 요식업으로 전향하였다. 하지만 일부 한약방과 관련된 직종에 있던 화교들은 한의약업으로 전향하였다. 한의약업은 다른 분야의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교들에게 차별적 대우가 없는 직종이었다.

먼저 요식업이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가능했던 것 같이, 한의약업도 외국인, 내국인의 구별을 두지 않고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면 한의원을 개업할 수 있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유리한 면이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의학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점차 높아졌던 것이다. 관심의 증가는 그만큼 많은 수요를 가져왔고, 경희, 원광, 동국, 대구대학등 여러대학에서 한방의학과를 신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정기적으로 한의사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전문의를 배출하였다. 따라서 화교 2, 3세들도 이 과정을 거쳐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화교들이 한약업에 종사하는 것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화교 한의사들은 예부터 전수되어 오는 중국의 한방 비법을 간직하거나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양도받은 비법을 가진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비법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의원 보다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또한 한약의 경우 부작용이 적고 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치료법은 양의학과 달리 한번의 실수로 목숨이 오고가는 일이 적어 우리나라사회에서 신임을 얻기 쉬웠다.

1975년에는 화교경영 한약방 56개 한의원 68개 양의원 2개 약국 1개였다. 화교들은 약재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수입하거나 한국산 한약재를 수출하기도 하였고, 그 당시 서울에 설립된 화교 한의원은 규모면에서 세계적으로도 드물 정도의 큰 규모를 갖추었다. 한국 정책에 의해 어려운 시기를 겪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한의약업은 순조롭게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한의약업이 쉬운 길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화교 중· 고등학교가 우리나라 정규 교육과정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거쳐야만 한국대학 입시가 가능하였다. 게다가 중국어로 교육을 받아온 화교들은 그만큼의 불리함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 또한 한의학에 대한 우리나라 사회의 관심 증가로 한의학과가 요구하는 학력의 수준도 점차 높아졌고, 한국 한의학계의 화교에 대한 견제로 화교들의 특례입학의 폭도 줄어들었던 것이다.

화교들은 우리나라 대학의 한의학과를 졸업하지만 실제로 처방은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을 지켜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면이 한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기도 하다.

화교들이 한의약업에 종사하는 것 자체에는 한국인과의 큰 차별은 없었지만, 한의사가 되는 길 자체가 좁았기 때문에 많은 화교들이 한의약업으로 진출하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대만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우리나라 국가고시를 치르는 길을 선택하는 화교들도 있다. 또 한의사가 아닌 약사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진출의 폭이 좁아 그 수가 많지 않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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