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8.26 월 16:36
2006년 5월 일간신문 창간 -> 2016년 11월 인터넷종합일간지 및 주간지 재창간
                    2018년 12월 15일 일간지 재창간
상단여백
HOME 교육 학교이야기
외환규제 ‘족쇄’…무역상 쇠락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한국 정부의 화교에 대한 정책과 법에 있었다.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도 화교억제정책을 펼쳤다. 특히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억화부마, 화교를 억제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을 지원하는 정책)와 같은 정책은 노골적으로 화교를 차별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와 우리나라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먼저 부미푸트라는 이미 화교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시행한 정책이지만 우리나라는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갈 때 시행되었다. 그리고 부미푸트라의 경우 화교가 차지하는 각종 비율을 말레이인 보다 낮게 밀어낸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화교의 실질적인 생활자체를 제한하는 정책과 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취한 화교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


1940년대 후반, 당시 우리나라에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화교들이 많았다. 화교들은 광복 직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무역업을 다시 일으켜 경제력을 잡아나갔다. 화교들은 자신의 모국 중국과, 그 근방의 무역도시인 상해, 마카오, 홍콩 등지와 교역을 활발하게 확대시킨 것이다.


당시 화교 무역상들에게는 많은 이점이 있었다. 일단 가장 유리했던 점은 화교들의 배경인 중국과의 교역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이미 무역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화교들은 그 무역망을 이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화교들과 경쟁할 만한 우리나라 무역기업이 없었던 것도 화교들이 수월하게 무역업을 일으킬 수 있던 원인 중 하나였다. 약 4, 5년간 한국 화교의 무역은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이렇게 번창하던 화교들의 무역업은 우리나라의 정책으로 심한 타격을 입고, 결국엔 사라지기에 이른다.


화교들에게 타격을 입힌 정책의 시작은 바로 ‘창고봉쇄조치’이다. 1950년 봄, 외래상품 불법수입을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적으로 창고를 봉쇄하고 조사했던 것이다. 화교들은 물품을 다량으로 구매해 창고에 보관해 두다가 적절한 시기에 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해왔기 때문에 ‘창고봉쇄조치’는 화교 무역상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다 준 것이다.


화교무역업자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정책은 바로 ‘외국인에 대한 외환규제법’이다. 화교들은 외환을 은행가로 교환할 수 있는 혜택이 없었던 것이다. 화교들은 외환거래에 제한을 받아 무역업의 확장은커녕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여야 했다. 화교들은 공식 환율보다 서너 배 비싼 암시장에서 외환거래를 해야만 했다. 만약에 화교들이 한국 회사의 2배의 실적을 올렸더라도 외환거래에서 입는 손실로 실질적인 수입은 2분의 1 실적을 올린 한국회사 보다도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규제를 피하기 위해 많은 화교 무역상들이 한국인과 공동명의로 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인의 명의로 외환거래를 하고 화교들이 실질적인 무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동업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폐업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번창하던 한국 화교 무역업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각 계층 두루 섭렵하며 ‘번창’

한국 정책과 화교-요식업 (1)


화교들이 각 나라에서 성장하기 위해 종사하는 업종은 전통적으로 무역업과 요식업이다. 특히 화교들의 막강한 경제력을 창출해 낸 업종은 바로 무역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화교들의 배경이 중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무역경로를 만드는 것은 비교적 수월했고, 이미 다른 화교들이 형성한 많은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화교 네트워크가 성장함에 따라 각 국의 화교 무역상들도 함께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역업이 실패해 버린 것이다. 외국인 출입규제로 네트워크가 끊기고 창고봉쇄조치, 외국인 외환규제로 화교 무역업은 거의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많은 화교들이 요식업에 뛰어 들었다. 무역업에서 갑자기 요식업으로 업종을 바꾸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교사회에는 무역업처럼 요식업에도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어 업종의 변환이 비교적 수월했다.


중국음식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외식중 하나이다. 국내 어디서든지 자장면 한 그릇 시켜먹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언뜻 생각해보아도 중국음식업계가 이렇게 많이 성장했으니 화교들도 그만큼 성장했으리라고 짐작하게 된다. 실제로도 화교들의 요식업 성장은 많은 이점이 있었다. 일단 화교들은 조리사 자격증을 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조리사 자격증 시험은 외국인, 내국인을 불문하고 시험을 통해 취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은 자본과 적은 인력을 가지고도 활동할 수 있어, 가족단위로 경영할 수 있었다. 또 당시에는 아직 한국인들은 중국음식점을 경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음식점은 화교들의 독점 분야인 셈이었다.


이렇게 무역업이 어려워지고 요식업이 유리하자 시간이 흐를수록 요식업에 종사하는 화교들이 증가해 갔다. 화교의 요식업 진출을 날로 증가해서 1948년에 332개에 불과하던 음식점이 1958년에는 1천702개소로 늘어났다. 불과 10년 만에 약 6배가 증가한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체 화교의 약 70%가 요식업에 종사했다.


화교들의 요식업이라고 하면 ‘아무리 대단해 봤자 고작 중국집인데 그게 대수라고…’라고 쉽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교들의 요식업 진출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화교들은 한국 사회의 각 계층 인구를 모두 섭렵했다. 화교들의 요식업은 규모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가장 소규모는 중국과점으로 만두, 호떡 등의 간단한 음식을 팔아 학생, 일반인들이 즐겨 찾았다. 다음으로는 우리 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중국집의 형태이다. 이는 싸고 널리 퍼져있어 대중적으로 많이 찾는 식당이 되었다. 또 서울의 대려도(大麗都), 태화관(泰和館), 인천의 공화춘(共和春) 등지의 고급 중국음식점들은 한국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사교장소로 이용했다. 이처럼 화교들은 아직 외식업이 다양화 되지 않았던 한국 요식업계에서 모든 계층을 두루 섭렵하며 성장해 나갔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i-today  bbory@i-today.co.kr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today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인천시 남동구 논고개로 77 에코타워 BD 503호  |  대표전화 : 032-833-0088  |  팩스 : 032-833-0014  |  사업자등록번호 : 771-88-00584
등록번호 : 인천 아 01279  |  등록일 : 2016.10.26  |  발행·편집인 : 남익희   |  사장 : 이성수  |  편집국장 : 김계중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정훈
Copyright © 2019 인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icnp@incheonnewspaper.com

NDsoft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