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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배제정책…‘영원한 이방인’ 취급
우리나라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인들의 유입이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달리 중세 이후의 우리나라는 줄곧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해왔다.


중국에 대한 교류는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국가에서 통제, 제한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화상의 성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나라에 화교가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한국 화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후기. 쇄국정책은 조금씩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갈린 시절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우리나라를 통해 외교적인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 때 일본이 청나라보다 먼저 강화도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해 청나라보다 우선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청나라가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는 틈을 찾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군란을 진정시키고 또 조선에 머무르던 일본군을 몰아냈다. 또 청나라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비롯한 연속적인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통상조약들은 한반도 내에서 화상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잃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나라를 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어, 문화 등의 정신적인 문명도 빼앗겼다. 그리고 토지조사제도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불리한 법을 만들어 땅 마저도 빼앗았다. 하지만 화교들은 사정이 달랐다.


일본 기업이 국내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 사람 보다 화교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들은 우리나라사람들보다 더 나은 급료를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교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일본은 한· 중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화 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만, 그리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고, 그에 따른 군사· 경제력을 우리나라에서 조달했다. 거기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징병했는데 그 수가 80만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화교들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초기 한국 화교들의 유입 증가는 청나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한 이민이 바탕이었다. 하지만 화교들이 급속하게 성장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잠시 줄었을 때는 중·일 전쟁으로 화교들이 적국국민으로 간주되었을 시기뿐이었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화교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춘절(春節, 중국의 설날)에는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 친지들과 함께 지냈다.

또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잦은 교류를 가지고 무역사업 등 경제적 기반도 중국을 원천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의 혼란한 상황으로부터 피난을 온 처지였기 때문에 중국이 안정되면 언젠가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 화교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화교의 수가 정체되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한국과 중국 양쪽에 있었다.

1948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외국인 출입을 규제하였다. 국내 외국인 입국이 금지되었고, 그것은 화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바로 1년 뒤인 1949년에는 중국에 모택동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주 억제책으로 외국이동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일 년에 한 번씩 갈 수 있었던 고향 방문은 물론이고, 화교 무역의 기반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적인 힘도 잃었다.


단절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의 화교들은 더욱 큰 단절을 겪어야 했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은 산둥성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에 거주했던 것이다.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화교는 한반도 전체 화교의 20%도 채 안됐다.

화교들의 생명력은 국경을 초월하는 꽌시(關係)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었다. 한국 화교들의 모습은 마치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 크루소와 같았다.

이렇게 고립된 화교들의 인구증가는 전적으로 자연증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화교들의 수난은 계속 된다.


한국 정부의 정책이 철저하게 외국인을 배제하는 정책이었다. 한국 정부는 외국인이 귀화하는 기준에 ‘품행’이나 ‘생계를 유지할 자신’등과 같은 애매한 항목을 두었고 법무부 장관의 허가까지 얻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들의 2세도 외국인 취급을 받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였다. 한번 외국인은 영원히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도 끊긴 마당에 한국 국적도 얻을 수 없고, 게다가 그 어려움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저 귀화만 못하는 것이었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 배제정책은 경제적인 면에서 더욱 가혹했다.

사실 당시 한국 무역의 약 70%는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화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한국정부는 한국인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모든 경제정책을 한국인을 우선으로 두었다. 그중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통화개혁이었을 것이다.

재산을 주로 현금으로 축적해 두던 화교들은 급작스러운 통화개혁으로 많은 손해를 입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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