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있는 화교 네트워크. 그들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대륙, 호주,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 개발도상국, 선진국을 막론하고 그들의 터전을 꾸렸으며, 갖은 고난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동아시아의 역사를 함께해왔던 우리나라에서도 큰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이 성장할 수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일단 미국, 호주, 유럽 등지와는 달리 같은 황인 족이라 인종차별의 걱정은 없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중국과의 교류도 원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역사를 공유해 온 동양문화권이라는 큰 장점이 있다. 새해 첫 날을 음력으로 지내고 추석을 지내는 등, 한국과 중국의 문화에는 공통점이 너무나도 많다. 게다가 한자문화권이라는 점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의사소통이 용이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 화교들이 정착할 때에는 일본, 미국 등의 나라와 같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화교들이 투자할 여건도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도 화교들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화교가 진출하고도 자리 잡지 못한 유일무이한 나라이다. 자리 잡기는커녕 화교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지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인천에 자그마한 차이나타운이 하나 있을 따름이다. ‘다른 나라에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성장한 화교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성장하지 못했을까?’라고 질문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한국의 화교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인천에 차이나타운 있잖아? 잘 정착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무관심이야 말로 화교가 대한민국 땅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2005년에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개최된다고 결정되었을 때, 많은 화교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한국은 화교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에 3대 차이나타운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였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경우는 인근의 도쿄 디즈니랜드보다도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을 정도의 관광명소이다. 일본은 이를 위해 국가에서 화교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원하는 정책은 고사하고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화교사이에 악명이 높았던 것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8차 세계화상대회를 통해 화교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했고 또 화교들을 위한 정책을 하나하나씩 추진해 나가고 있어, 화교의 수는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화교는 급증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여전히 미비하다. 화교가 급증하는 것은 마치 불과 같지 않을까? 불은 유용하지만 잘 알고 쓰지 않으면 꺼트릴 수도, 화를 입을 수도 있다. 몰려오는 화교들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되었다. 더 이상 무관심으로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淸때 상인 40여명 입국 ‘시초’

최초의 한국 화교

취직할 때나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이력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이력서는 다시 말해 자신의 과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알면 현재나 미래를 미루어 짐작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를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만큼의 중요함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 화교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 화교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화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는 먼 고대에부터 함께해 왔다. 오랜 역사 속에 이웃해 있는 우리나라는 적국이 되기도 하고, 우방국이 되기도 하며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 와중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중국의 옛 역사서에서 찾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격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그 예이다. 한국에 중국인이 맨 처음 들어온 기록도 바로 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 따르면 은 왕조의 말, 주 왕조의 초(BC 1112년) 때, 은의 태자인 기자(箕子)가 5천의 군중을 데리고 한반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인이 처음 외국에 나간 사례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한국화교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고대의 일이기 때문에 화교라고 칭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또 위만이 천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망명했다고 하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역사의 각 시기마다 중국인들은 개별 또는 집단으로 우리나라에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이주는 산발적이어서 현재의 화교를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본격적으로 ‘한국 화교의 시초’라고 부를 수 있는 화교들이 등장한 것은 청나라 때이다. 1882년 8월 조선과 청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 청나라는 군함 3척과 상선 2척을 파견하였다. 청국군인 3천명과 군수품 보급을 위해 동반한 상인 40여명의 입국이 본격적인 화교이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화교이민이 촉진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청나라 내부의 혼란이었다. 먼저 1898년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다. 폭동의 진원지였던 산둥성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많은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에 피난을 왔다. 그리고 1920년에는 산둥성, 안휘성, 강소성 등의 농업지역을 대홍수가 휩쓸었으며, 1940년대 중후반 중국대륙의 정치변동도 화교들의 유입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화교들이 증가하여 1940년대에는 약 8만 명의 화교가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화교 인구는 얼마 있어 1만7천 명 정도로 줄어 다시 8만 명의 인구를 회복한 것은 21세기가 된 후의 이야기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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