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인터뷰- 12.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 교사

출발은 교정에 남은 흔적들 연원 찾아가기에서였다.

영화학교 구석구석에는 의외로 인천역사의 잔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천근대사로 관심이 이동한다.

개항장일대를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머릿속엔 지역사가 더해진다.

해방공간이라는 지점에 서자, 딱 멈추어섰다.

이제 시선은 현대사에 꽂힌다.

“해방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인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분히 우익적 관점이라는 느낌이 다가왔습니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양적으로 축적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역사의 현장을 거쳐온 이들의 증언을 모으는 일을 누군가 해야지요.”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가 나름대로의 사명감으로 인천 현대사에 몰두하는 이유이자 해법이다.

▲인물로 인천현대사 접근

“인천에 대한 저서를 구입하다보니 근대사 관련 자료는 넘치지만 해방공간이후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영화학교사를 정리하다 학생으로 혹은 교사로 이 학교를 거쳐간 인물 중 현대사에 지대한 영항을 미친 이들이 상당수임을 알게됐지요. 이들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인천현대사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초기 접근방식은 학구적이었다.

영화여자정보고 교사의 직분에도 들어맞았다.

한참 인천근대사에 재미를 들이고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자료찾기에 몰두한다.

일제말 친일행적이라는 오점을 남겼으나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마찬가지로 이대총장을 지낸 서은숙, 이대 사대를 설립해 우리나라 유아교육 틀을 세운 김애마가 영화여자매일학교(설립당시 제물포여자매일학교, 1901년 영화로 개명) 출신이라는 것을 본다.

그가 꺼낸 인물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한국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김기범(김애마 부친)은 1915년 영화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김태진은 영화남자매일학교를 거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으로 유학, 독립운동에 앞장선다.

미군정 초기 교육정책을 주도한 초대 문교부 장관 오천석도 17세에 인천에 와 미국으로 유학 떠나기전까지 영화여자매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아일보 기자출신으로 해방후 한민당 사무국장을 지낸 이범진은 영화남자매일학교 출신이면서 교사였다.

영화학교를 나온 갈홍기 목사는 미국 시카고 유학후 귀국, 창영교회 초대 목사를 지내면서 친일 행적을 했다. 설명이 끝이 없다.

“대략 정리를 해본다면 영화여학교 출신들은 1920, 3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와 해방이전에는 친일 행적을 하다 해방후 이승만정권과 친미 우익계열에서 활동한 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남학교출신들 기록은 대부분 소실된 상태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인천에서 좌익, 혹은 우익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죠.”

영화학교 출발(1892년)이 최초의 인천주재 선교사인 존스목사 부부에 의해서다 보니 인천교회사속 인물로 확장된다.

관심이 두 인물에 머문다.

1930년대 내리교회 엡워스청년회장을 맡은 박남칠과 이보은. 일제하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이들은 해방공간에선 좌익의 핵심인물이 된다.

“당시 기독교와 좌익은 극과극의 관계였습니다. 두 인물은 어떻게 경계를 넘어갔을까. 이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야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인물 찾기로 지낸 그간의 시간이 어느덧 3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방향전환이 필요했다.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들에 관심

올 봄 이 교사는 김포 세안교회 최태훈 담임목사를 만났다.

지난 1999년 한국전쟁당시 우익에 의한 강화민간학살을 처음으로 밝혀내 세인의 관심을 모은 장본인이다.

“인천 교회사 인물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상호 연구해온 영역이 마주치자 막연했던 것이 비로소 정리가 되더군요. 박남칠 이보은 관련, 기록에는 월북으로 남아있으나 실상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을 당한 겁니다.”

인천현대사 고리를 풀기위한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박종렬 목사와 이희환 인하대강사가 합세했다.

“인천·강화지역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상보고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나는 기독교인 학살쪽을 맡았습니다.”

영흥도와 월미도, 강화 온수리 등지를 누비고 다녔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이들은 이미 고령이었다.

이들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면 현대사는 묻혀버리고 말 것이라는 조급증이 그를 몸달게 했다.

“초기 기독교부터 믿음을 가졌던 한 가족이 일제의 탄압에도 종교를 지켜오다 해방후 종교를 버린다거나, 독실한 교인 일가가 어느순간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유인 즉은 한국전쟁 학살 피해자였던 겁니다. 주목할 것은 가해자가 그동안 줄곧 알고 있었던 좌익이 아니라 우익이라는 것이지요.”

6.25를 겪으면서 희생된 인천지역 민간인이 1만7천~1만천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기록상 1천800여명의 10배가 넘는 수준이다.

“당시 사실을 들춰내는 의도는 잘 잘못을 가리자 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양쪽의 역사를 균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자는 이유지요.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국가가 어루만져야 합니다. 국가차원에서 사실을 규명하고 보상을 해야지요. 그러려면 피해의식으로 여전히 움츠려 있는 당사자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교사로 인천에 오다

태어나서 줄곧 대전에서 초·중·고교를 마치고 대학도 그곳에서 다닌 그가 인천에서 교사로 사회 첫발을 내딛은 것은 뜻밖이었다.

졸업직후 대전에서는 한 무크지에 실린 글이 사회적으로 이슈화 된 일명 ‘민중교육 사건’이 터진다.

대학 직속 선배들이 연루되면서 교직에 있는 이들이 줄줄이 해직됐고, 그 피해가 후배들에게까지 갔다.

“대전을 포함한 충남 전지역에서 우리과 출신 채용을 기피했습니다.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다가 인천을 택하게 된겁니다.”

1988년 부평고등기술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한다. 이후 꼬박 4년을 채웠다. 얻은 것은 교직에 대한 회의였다.

“고향을 떠나 온 아이들이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야간에 공부하는 곳이었어요. 월급이 몇십만원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등록금을 내라고 채근해야하는 것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없이 부끄러웠죠.”

문제지를 만드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빨리 답을 찾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다.

다시 돌아온 곳이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다.

“이후 10년을 치열하게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육의 진정성을 찾아야한다는 의무감과 교직에 몸담은 자로서 해직교사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이 기간 전교조 인천지부 사립지회장과 본부 정책위원, 전국사립위원회 정책교섭국장을 건너갔다.

“결말은 탈퇴로 찍었습니다. 스스로 경직되고 관료화됨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영화학교사에서 출발

어느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교정 본관앞 화단에서 ‘휴즈 &힐 기념관’이라고 새겨진 머릿돌을 발견한다.

이를 명쾌히 설명해줄 이가 주변엔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영화학교 70년사를 꺼내들었는데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학교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의외로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더군요. 발견의 기쁨이 온몸에 퍼져나갔습니다.”

이후 관심은 온통 인천사에 머문다.

인천시역사자료관에서 자료를 얻기도 했다.

인근의 ‘아벨서점’은 그가 자주 찾는 공간이다. 그만의 방식대로 공부를 더해간다.

“학교자료를 찾아가다 인천공부를 하게 됐고, 그리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의문이 들면 답이 이틀만에 나오기도 하고, 때론 2년만에 풀리기도 하죠. 공통점은 열심히 찾으면 언젠가는 만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힘이에요. 또 한가지, 앞으로 10년후면 정년퇴직인데 그 후에도 분명 할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몰두하는 일이 하냥 재밌고 즐거운 그는 정작 행복한 사람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안영우기자 dhsibo@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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