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싱가포르, 태국과 같은 나라는 화교와의 융화가 잘 이루어져 화교들이 살아가는데 좋은 환경이었지만, 동남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화교들에게 좋은 여건을 제공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교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화교들은 현지인들로부터 곱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되었을까? 그저 민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들이 화교들에게 보내는 미움은 보통의 정도를 넘어섰다.

나라별로 각각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그 공통적인 이유를 들자면 첫 번째로 화교들이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화교들의 급성장을 반대로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현지인들은 화교들이 진출함으로써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긴 격이 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화교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반중(反中)감정이 격해지면서 자신들의 곁에 있는 중국인, 즉 화교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탄압, 혹은 현지인들의 반(反) 화교 폭동 등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갖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화교들은 계속 성장해 나가 동남아시아에 뿌리를 내렸다.

인도네시아의 화교들은 주로 자바, 수마트라, 깔리만딴, 술라웨시, 이리안자야 등지에 모여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대도시에는 차이나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4%가 화교이며 특히 수마트라의 메단(Medan)시에는 150만 명의 인구 중 30%가 화교이다.

현재의 화교사회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할 당시 성립되었는데, 네덜란드는 값싼 중국인 노동자인 쿨리(苦力)를 수입해 와 인구가 증가하였고, 또 화교 기업인들을 중개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화교 기업인들에게 특권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자 그동안 유리하게 작용하던 식민지 정부와의 관계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화교에 대해 공식적인 차별 정책을 펼쳐, 거의 모든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의 시민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1959년 농촌지역 사업이 금지되고 한자와 중국어의 사용도 금지 되었다. 또한 1965년 반공산당 작전기간 동안에 수많은 화교가 살해되었다. 불과 10년 전에도 인도네시아에서 큰 반 화교 폭동이 일어나 많은 화교들이 인명과 재산을 잃어,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의 현지인들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크게 성장해 그들의 경제규모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국교회복을 위해 화교들의 시민권 수속을 완화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고, 1999년에는 중국계 인도네시아 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점차 인도네시아 화교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고 있어 인도네시아 화교의 지위 향상이 기대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린샤오량(林紹良)의 사림 그룹이 인도네시아의 최대 그룹으로서 자리하고 있고, 아스트랄 그룹과 시날마스 그룹도 주요 기업으로 자리하고 있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이승훈 연구원

독립 후 억압·차별 혹독…反화교 폭동 등 갖은 고통

‘비 온 뒤 땅 굳는다’라는 말은 말레이시아를 두고 말하기에 적절한 말이지 않을까?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정치적, 사회적 고난을 딛고 굳은 땅처럼 단단하게 결합되었다. 물론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화교들은 고난을 겪었지만 말레이시아의 경우에는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화교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혹독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배경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같이 서구 세력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반 화교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단순히 소수민족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억압과 탄압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닮은 면이 많다. 말레이시아 역시 인도네시아처럼 식민지시기를 겪었으며 마찬가지로 노동력 보충을 위한 쿨리(苦力)로 인해 화교의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독립 후에는 말레이시아인 우선정책인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억화부마, 화교를 억제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을 지원하는 정책)로 화교들을 억압해왔다. 게다가 화교들은 정치사상적인 갈등에도 휩쓸려야 했다. 말레이시아의 공산당이 유혈폭동을 일으켜 반공을 외치는 세력이 증가하고 따라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1969년에는 대규모 반 중국 폭력사건이 일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인이 이끄는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잔인한 폭력 혁명을 일으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사태가 진정되었음에도 사회적, 정치적 반 중국의식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에는 중국이 동남아시아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려하고 또 중국의 경제력과 화교자본의 이익을 견주어 말레이시아 정부는 점차 화교에 대한 정책을 완화시켜가고 있다. 현지의 반 중국의식은 아직 건재하지만 정책이 친(親)중국의 길로 돌아서는 만큼 화교와 현지인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리라 기대된다.

재미있는 건 이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화교들의 단결이 더욱 견고해져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화교들은 꽌시(關係)를 더욱 돈독히 하여 성씨별, 지역별, 업종별로 협회를 구성하였고, 이를 총괄하는 ‘말레이시아 중화상공연합회’를 만들어 ‘부미푸트라’정책과 말레이시아인들의 반 중국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약 25%정도에 불과한 화교가 말레이시아 상장 주식의 약 60%, 자본의 40%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말레이시아 경제를 손에 쥐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금융, 부동산 등의 사업을 하고 있는 MPHB가 있으며, 샹그리라 호텔로 유명한 궈허녠(郭鶴年)의 샹그리라 그룹(Shangri-la Group)도 지금은 홍콩으로 본사를 이전했지만 말레이시아 출신 화교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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