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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현지 사회 동화
화교들은 그들이 겪은 고난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기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정말로 중국인에서 벗어나 화교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했다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화교들 역시 대부분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고 중화사상(中華思想), 즉 한족(漢族)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쉽게 사라지는 사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화교들은 모국인 중국에서 중국문화를 가져오는데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화교사회에 중요한 특징이 생긴다. 바로 ‘화교의 현지화(現地化)’이다.


화교의 현지화란 말 그대로 현지, 즉 정착한 곳에 사회일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중화사상으로 굳어진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일단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동남아시아의 각 나라들은 식민지 통치를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정부들은 국가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는 서구기업들을 국유화하였고,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기업들을 장악하였고, 이외에도 독립을 하게 된 국가들은 경제권 장악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화교들도 그 경제권을 쥐려는 정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화교들, 그리고 화교자본은 결국 그들 국가의 경제권 밖, 즉 중국의 자본으로 취급해 화교들에 대해 강압적으로 대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억화부마, 화교를 억제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을 지원하는 정책) 정책과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토착화 정책이 있는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외에도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새로운 중국인의 이민을 제한했고, 화교의 정치활동도 제한되거나 금지 되었다. 심지어는 외국 국적을 가진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금지하고 재산몰수, 강제이주들이 행해져, 그야말로 박해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의 언어를 쓰고, 현지의 법을 따랐으며, 어떤 화교들은 현지 식으로 이름마저 바꿨다.


하지만 화교들이 그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현지화를 택한 것만은 아니다. 화교들 사이에서도 현지 사회에 동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계속되는 반(反)화교 폭동 속에서 화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모국, 중국이 그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라 판단하고 새로운 중국인의 이민이 불가능한 이상, 현지에서 적응해서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현지화된 화교들을 화인이라 부르게 되었고, 화인들의 2세가 늘어남에 따라 화인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또 2, 3세로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중국인으로서가 아닌 화교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검소한 생활·높은 교육열

중국인과 다른 화교만의 기질


만만디와 꽌시. 화교들은 중국인의 기질에서 이어온 기질들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모국인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에 계속 함께 해왔다.


하지만, 화교가 그저 중국인의 기질을 가지고, 중국의 역사를 그대로 쫓아가기만 했다면, 지금의 화교와 같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성공하듯이, 순자가 청취지어람이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이라고 말했듯이, 화교들은 그저 중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하고 더 나아가 성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의 기질과는 다른 화교들의 기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중국인과 화교들의 다른 점을 찾으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과 화교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인은 중국에서, 화교는 중국이 아닌 타지에서 생활했다는 이 차이점이 중국인들과 다른 화교만의 기질을 가지게 해 준 것이다.


화교들이 중국에서 중국인으로서 있었을 때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인이었고, 모든 생활이 중국인에게 편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중화사상이라는 거대한 사상이 그들에게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교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모국을 떠나야만 했고, 그로인해 그들은 대륙의 중심에서 생활하던 주류 민족에서 다른 나라에 끼어 살고 있는 비주류 민족, 즉 소수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많은 소수 민족들이 그러했듯이, 혹은 그러하듯이, 화교들 역시 모국이 아닌 땅에서 소수민족이 된 이상 박해, 차별 대우, 정치적 억압들의 핍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교사업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민 1세 중 90%는 전쟁을 경험했고, 40%는 문화혁명과 같은 정치적 대란을 겪었으며, 32%는 가정을 잃었고, 28%는 경제적 재난을 맞아 막대한 재산 손실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수치 인용 : ‘화교’ 정성호, 살림)


소수 민족이 되어버린 화교들은 살아남기 위한 대책을 강구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언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것은 바로 절약과 교육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한다. 6·25 한국전쟁 전후,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나라 땅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힘은 다른 여러 가지 요소도 많이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던 절약과 교육의 힘이야말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화교들은 살아남기 위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했지만, 돈이 적게 나가는 것을 더 중시해야했고, 자녀를 교육시켜 후대에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을 희망했다.


이로써 검소한 생활과 높은 교육열이 화교들의 기질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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