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국의 모습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거친 대륙과 사막 등의 모습이다. 하지만 화교들은 대륙을 떠나 그 넓은 대륙보다도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세계의 이곳 저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화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대륙에서는 중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서 영영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해외무역 발달로 화교들 역시 각각의 나라에서 성장해 왔을 것이다. 중국 바다의 역사. 그 역사의 어느 곳에도 화교가 존재한다. 중국 바다의 주인공은 화교인 것이다.

송(宋), 원(元)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화교들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명나라 때 화교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영락제(永樂帝)때 정화(鄭和)의 대원정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약 30년간 7차례에 걸친 당시 정화의 함대 원정은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평가 받는다. 대 선단(船團)을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스와힐리에 이르기까지 30여개 나라에 원정해 수많은 외교사절이 왕래하고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지만 이 원정은 1433년 7번째 항해를 마지막으로 중지되었다.

비록 국가적인 왕래는 중지되었지만, 이미 7차례의 원정에서 열린 교역로를 통해 국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중국 연해지방의 상인들은 계속 교역을 이어갔다.

16세기 중엽에 해금령(海禁令)이 완화되자 그동안 억눌렸던 중국 남부, 즉 화남(華南) 지방의 상인들이 폭발적으로 무역에 뛰어들어 해외무역의 꽃을 피웠다.




(명(明)의 정화(鄭和)가 인도양에 진출한 것(1405~1933)은 바스코다가마가 인도양에 도달한 때(1498)보다 80~9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런 중국의 해외무역과 함께 줄곧 성장해 온 화교였지만, 역으로 중국의 해외무역이 정체기에 들어서면서 화교 또한 침체기를 맞는다. 청(淸)은 명대(明代)에 존재했던 해금령(海禁令)을 더욱 강화시켰다.

소수의 민족이 한족(漢族)이라는 많은 수를 지배하기 위해선 대륙은 물론이고, 바다에서도 반대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해양에서는 명 황조를 옹립하는 세력이 등장했고 그를 막기 위해 청나라는 강제 이주정책을 펼쳤다.

해안 사람들을 내륙으로 강제로 이동시켜 그들이 명의 잔존세력을 돕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 천계령(遷界令)이라고 하는 강제 이주정책은 1662년부터 1681년까지 19년동안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화교들은 중국대륙과의 끈을 상당수 잃었을 것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화교의 비상

대륙 잠든 사이 화교들은 세계속으로

청(淸)이라는 이름의 중국이 바다에서 눈을 돌린 사이에 중국 남쪽 바다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로 서구 세력이 앞 다투어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중국의 금해(禁海)정책으로 인해 중국과의 교역의 끈은 많이 잃어버렸지만, 화교들은 그저 손 놓고 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륙이 잠들어 있는 동안 반대로 화교들은 과감히 세계에 뛰어 들었다.

1786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말레이시아에 세워지고 싱가포르가 자유무역지역이 되자 중국의 상인들이 빠르게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현대 화교사회의 직접적인 토양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큰 규모의 화교세력이 등장하기엔 아직 화교의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화교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중국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화교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닌 19세기경 쿨리(苦力)들에 의해서였다.

1862년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자 노동력 부족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인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흑인노예가 불가능해지자 황인노예를 사들인 것이다.

한편 영국은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와 같은 나라를 식민지화하고 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쿨리들을 수입하였고, 그 밖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등의 나라들도 쿨리들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했다.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 노동을 하게 된 쿨리들의 고통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쿨리(苦力)라는 이름에 들어간 고(苦)는 그저 이름뿐인 게 아닐 것이다.

168개국에 8천700만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 영국이 싱가포르를 자유무역지역으로 만들자 수많은 화교들이 싱가포르로 모여들었다(출처·싱가포르관광청).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화교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동남아시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은 쿨리였고 이미 많은 화교들이 금융, 무역, 제조, 운송 등의 기반을 잡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경제 및 산업을 서구 세력이 장악했기 때문에 화교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식민지의 독립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많은 화교자본이 유입되고 화교들이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이 크게 성장하면서 그물처럼 얽혀있는 전 세계의 화교들도 함께 성장해 오늘날의 거대한 화교사회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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