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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시대’ 해상무역 발달 세계속으로 화교들 나가다
중국의 최초 해외진출이 최초의 화교를 만들어 냈듯이 중국의 해외무역이 발달해 감에 따라 화교가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된다.


중국 무역에 아니, 세계 무역에 한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비단길, 즉 실크로드가 아닐까한다. 실크로드는 한나라의 무제 때 만들어져 동서 문물 교류의 장을 열었지만, 한(漢)나라가 멸망하자 중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서진(西晉)의 짧은 재통일 이후에 북부지방에는 이민족들이 싸움에 가세하여 북방의 재력가들은 자신의 가족, 재산 강남지역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또 티벳, 아라비아 등에 의해 육로를 통한 실크로드(Silk Road)가 막히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 중국의 동남해안선을 따라 해로를 통한 실크로드(The Silk Voyage)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880년에는 광저우(廣州)에서만도 이슬람, 유태, 페르시아 상인의 수가 12만 명, 인도네시아, 실론, 인도 상인들은 각각 그 수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특히 남송(南宋)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 농경과 방어중심의 견고한 성으로 만들어진 성이 아닌 중국 통일왕조 최초로, 바다에 면한 도시인 항저우(杭州)에 수도를 정하여 해상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여기까지의 내용과 화교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은 마치 불과 나무가 연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중국 해상무역의 발달은 화교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제부터 세계에 화교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생각해보자. 한나라가 멸망했을 때 북방의 재력가들은 이민족의 위협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렇다면 송(宋)나라가 멸망했을 때 나라에서 많은 혜택을 받던 사람들이나 혼란과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어디로 피난했을까?

송의 많은 이들이 동남아시아, 태국 등의 나라에 이주를 했다. 또한 원(元)이 멸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또한 13세기 말 원나라 때 최초로 해양원정이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참가남송(南宋)은 수도를 바다와 닿아 있는 항저우(杭州)로 정하여 해상무역의 발전을 도모했다. (참고 사진과 그림으로보는 케임브리지중국사, 시공사)



서복(徐福)을 화교의 시초로서 이야기 했지만, 사실 그 명맥은 불분명한 것이라 오늘날의 화교들과 연관을 시킬 수 없다. 하지만 한을 지나 송, 원의 시대에 이르러서 중국의 해상무역 발달로 인해 오늘날 화교들의 조상 격인 화교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저 단순히 해외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해상 무역 안에서 함께 성장해 온 것이다.


화교의 씨앗

진시황 화교형성에 지대한 영향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연기만 본다고 연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궁이에 불이 붙어있지 않으면 애초 연기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세계 각지에서 성장하고 있는 화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왜 그들의 모국인 중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을까?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이토록 크게 성장한 것일까? 지금의 화교를 있게 한 수많은 원인들을 찾으려면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화교들의 역사. 이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한 옛날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혼란스럽던 중국대륙을 평정한 한 남자가 있었다. 중국을 제패한 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그는 한 주술사에게 불로초를 찾아올 것을 명했고, 그 주술사는 동남동녀 3천명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그 주술사는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중국 대륙의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진시황의 이야기이다. 그가 보낸 서복(徐福)이라는 주술사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발해만, 한반도의 서쪽 해안, 제주도, 혹은 일본에 갔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따름이다. 그들이 어디에 가서 정착해서 살았건 결국 그들은 최초의 화교가 되는 셈이다. 최초의 화교. 그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진출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진시황은 화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업적을 또 하나 남긴다. 바로 강제 이주이다. 중국 대륙을 통일시킨 진시황은 촉, 오, 월 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천민과 죄수, 그리고 상인들을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촉, 오, 월 나라가 있던 강남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왜 상인이 죄수, 천민과 같은 취급을 받았을까? 그것은 유교에서 상인을 가장 낮은 부류의 계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가에서는 상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이들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진시황은 동남아시아와 면해 있는 남부 지방에 상인들을 모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화교들이 중국 남부 연해지방에서 비롯되었고 전체 화교의 86%가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시황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천년 후 화교라는 거대한 세력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을 다진 것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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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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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덕연 2008-09-20 12:04:05

    왜 상인이 죄수, 천민과 같은 취급을 받았을까? 그것은 [[유교에서]] 상인을 가장 낮은 부류의 계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사에 유교에서 상인을 가장 낮은 부류로 생각했다고 하셨네요. 상공업을 억제한것은 맞지만 진나라때는 상앙의 법가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였습니다. 상앙은 백성들이 "농사와 전쟁"에만 집중하는 것을 최선으로 보았지요. 승훈아 수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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