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인터뷰-10. 이종복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문화운동가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태어난 후 줄곧 인천 중구 신포동에서 살아온 그의 관심은 지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지역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지점에 관심이 늘 머물러 있다. 그리곤 작은 실천들을 묵묵히 밟아간다. 그의 삶에 대해 문화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마냥 어색해 한다. 단지 ‘터잡이’로 불리기를 바랄뿐이다. 이종복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가 그다.

▲10년맞은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올해로 꽉 찬 10년이 됐습니다. 지난 1996년 5월 공간을 열고 달려온 세월입니다. 철 모르고 의욕만으로 덤비던 20대 멤버들이 이제 장년이 돼 지역 곳곳에서 방향을 잡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어 마음이 부유합니다.”

이 대표는 몇날 며칠 고민하며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이름을 짓고 로고를 만들던 그시절 회상으로 이야기를 연다. 쓸모있음으로 인해 불려다니며 ‘나홀로’ 문화활동을 하던 그가 체계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찾은 해법은 구심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일할 수 있는, 편안한 사랑방 구실을 하는 공간. 지역성을 담보하는 것은 전제였다.

“터진개는 신포동의 옛이름이지요. 내가 살고 있는 지역 그 자체죠. 문화마당은 인천에 대한 사랑을 맺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결과는 황금이라는 열매예요.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열매가 맺혀지도록 받쳐주는 가지입니다.”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내 문화운동의 구체화가 필요했다.세가지 축을 세웠다. 지역현안에 대한 접근으로 작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을 운동의 방향성으로 놓고 ‘중구지역 역사문화 연구’로 한 가닥을 잡았다. 개항이후 식민지의 어두움을 겪은 이 도시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는 것이 지역운동의 출발이자 동시에 목표가 된다는 인식에서다.

살고 있는 인천을 속속들이 알기위한 역사기행에 집중하는 것이 또 한 축이다. 나머지 줄기는 풍물을 매개체로 지역운동에 대한 인식 공유와 확대로 잡았다.그의 철학과 문화적 양식을 공감하는 친구와 선배, 후배들이 황금가지에 와서 일꾼으로 차근차근 일을 풀어나갔다.

“초창기에는 주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나게 일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너도나도 후원자로 나섰죠. IMF를 맞으면서 일련의 지원이 그만 중단됩니다. 제정적인 지원이 있다면 지역의 역사문화운동단체가 올곧게 설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내내 지니고 삽니다.”

해를 더하면서 서서히 성과물이 잡히기 시작한다. 인천역 인근의 근대 유적과 건축물을 돌아보는 ‘개항장 거북이 마라톤’이라든가, 주제를 정해 떠나는 ‘인천장정’은 제법 다수의 열성파들을 만들어냈다.

“인천역에서 출발, 영국대사관, 공화춘, 중국영사관, 58은행, 세창양행 등 25곳의 유적지를 밟아보는 것이 거북이 마라톤입니다. 유적지를 짚을 때마다 도장을 찍어주는 식이죠. 10월마다 열어요. 지난해에는 500여명이 참가했습니다.”

인천장정은 8월15일 광복절에 여는 프로그램이다. 인천의 해안선을 따라서, 개항의 참의미를 찾아서, 인물 탐방등 매년 한가지 주제를 정해 강행군에 나선다. “인천의 주산을 따라가는 장정에서는 소래산에서 출발, 계양산까지 열여덟 시간을 행군하기도 했어요. 고생스럽지만 장정을 마치고 나면 인천의 숨결이 바로 느껴집니다.”
인천관련 자료를 찾아내고 묶는 작업도 계속 해나갔다. 때론 일부에서 독점하고 있는 자료를 풀기도 했다.

풍물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초창기 지역문화활동을 풍물로 했던 그다. “고등학교를 찾아가며 가르친 세월이 어느덧 6년이에요.”

▲일찌감치 “신부는 나의 길”

오랫동안 그를 잡고 있었던 끈이 사제의 길이었다.고교시절 한 사람을 만나면서 인식의 성숙을 겪는다. 이때부터 일찌감치 신부의 길을 마음먹었다. 부연설명을 하면 이렇다. 고 1여름방학때 우연히 한 교사와 교우하게 된다. 한달동안 매일 만나 그가 걸어온 삶을 들었다. 그가 건넨 책이 프랑스 신학자 에티에르의 ‘철학과 신’, 그리고 안병욱의 ‘현대사상’이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며 살아온 청소년기에 난생 처음 철학개론을 접했는데, 세상이 꽉막힌 곳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신부의 길이었습니다.”

배경이 더 있다. 조부의 당숙이 김대건 신부다. 어려서부터 6형제 중 한사람은 사제가 돼서 순교자에게 봉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왔다. 집안내력에 카톨릭이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신부가 돼야하나 하는 고민의 종지부를 찍은 겁니다. 삶의 방향이 정해지자 공부엔 더이상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다. 신학대학에 가기위해 나길모 답동성당 주임 주교에게 추천서를 당부했는데 일반대학을 선택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가 있어요. 사제의 길을 가던 첫째형이 중도하차한 상태인데다 다른형마저 교수와 문제가 있어 학교를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신학교에는 보이지않는 연좌제가 있었던 겁니다. 저를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 대신 일반대학을 다니다 오라고 하더군요.”

길이 틀어져버렸다. 그는 경기대 법학과를 선택한다. “이제부터 어디 공부나 한번 열심히 해보자 했습니다.”

▲신학을 바라보는 인식이 변하다

대학시절 또 한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겪는다. 이번에도 우연이였다. 친구의 권유로 구로공단 노동자 야학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됐다. “노동자와 나의 삶이 이처럼 대비되는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나, 세상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학내 운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인천에서도 답동 카톨릭대학생회장을 맡으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체계적으로 배워나갔다.

신학에 대한 시각도 서서히 변해갔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느님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어야 한다. 절대자처럼 나도 누군가를 돌보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나의 최종 대안이 아니다. 하느님 존재성 그 자체가 변한겁니다.” 공중에 떠 있던 발이 비로소 땅에 닿았다고 말한다.

다음 수순은 학생 운동권이 다 그러하듯이 군 강제징집이었다. 제대후 돌아오니 6월항쟁 직후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곳곳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더이상 밀실에 갖힌 하느님은 안된다. 내 주위에 있는 시장사람이 나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맺힌 공부를 하자 결심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중병을 얻으셔서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하시던 방앗간 일을 이을사람이 나밖에 없더군요.” 1년만 돕겠다 작정했는데 떨쳐버리지 못한채 올해로 18년이 됐다며 웃는다.

▲실마리를 풍물에서

지역운동을 포기할 순 없었다. 해서 선택한 것이 풍물이었다. 일찌기 고교시절 제대로 은율탈춤을 배워둔 그였다. 답동성당 청년회 ‘늘푸름회’에서 강습요청이 왔다. 열심히 가르쳤다. 다음은 INI스틸 풍물패, 그다음은 인천유치원교사협의회, 입소문을 타자 여기저기 와달라는 제안이 온다.

“10여년을 몰두했습니다. 그 세월동안 풍물이 대중운동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정점에 도달했을 때 역할을 대물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홀로’ 풍물활동을 놓고 다른이들과 함께 체계적인 지역문화운동으로 뛰어넘는 시점이다.

▲인천의 문화운동

지역 문화운동성에 대해 그는 인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체계화된 자기논리가 아직은 부재하다고 짚는다. 가령 맥아더 동상 이전·존치를 놓고 이념대립으로 치닫는 것이 현재 우리모습의 한 단면이라고 지적한다. 이보다는 만국공원을 상징적 공간으로 어떻게 조성하는가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이끈다.

“아주 암울하지만은 않아요. 인천을 위한, 인천에 의한, 인천의 철학에 대해 이제 대화를 여는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향후 10년후면 나름대로 철학이 형성될 것으로 봅니다.”

반드시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인천인에 대한 개념정리다. “아다시피 인천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아직은 소수입니다. 외지에서 와 살면서 인천에 대해 진정한 사랑을 갖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토박이 개념을 이들에게까지 확장해야 합니다.”내놓은 답이 ‘터잡이’다.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를 이끌어가는 그 다운 정답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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