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관계의 소통을 풀어오던 ‘스페이스 빔’이 남동구 구월동 시대를 접고 지난달 동구 배다리에서 둥지를 틀었다. 방치돼 있던 옛 인천양조장 건물을 리모델링, 문화공간으로 문패를 달았다.

인천의 문화예술 중심지를 떠나 상대적으로 침체돼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간 이유가 분명 있다.

요즘 그곳에서는 산업도로 관통이라는 관주도 개발논리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강인한 결의가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주민 문제를 넘어 지역현안으로 떠오른 상태다.

“그 공간에 들어가서 보다 많은 주체들과 자율적으로 관계를 맺고 현장성과 구체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산업도로 무효화를 외치는 주민들에게 힘을 더하고 싶은 것이 하나이고,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과 관계를 확장시키며 제도화된 전시공간을 넘어 열린공간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스페이스 빔을 운영해온 민운기 디렉터가 이전한 이유를 짚는다.

#. 지역에 대한 가치 발견

“올 초 기획탐사팀을 꾸려 3개월에 걸쳐 ‘도시유목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배다리 일대에서 5일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간이 가진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동시에 산업도로 관통으로 지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됐어요. 그 상황을 알리는 보고회를 열었습니다. 파괴돼서는 안될 건물들이 있는 곳입니다. 공간을 살리는 일에 나서야겠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도시 중심에서 스페이스 빔을 운영하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좋은 공간이 있으면 이전을 고려하고 있었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옛 인천양조장 건물이 방치돼 있음을 알게 됐다. 공간 활용에 대해 집주인에게 타진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양조장에서는 10년 전까지 근 70년동안 서민들의 고된 노동의 수고를 덜어주고 삶의 애환을 달래주던 막걸리를 만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주민들 곁으로 다가가는 예술활동을 펴고 공간을 운영하는 것이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달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드디어 지난달 8일 스페이스빔 커뮤니티 회원들과 문화예술인, 주민들을 불러 조촐하게 개관식을 가졌다.

두가지 접근방향이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는 배다리를 지키는 시민모임과 배다리주민 대책위원회 등과 연계해서 산업도로 무효화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또 하나는 주민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예술이 지닌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공간으로 일궈가는 것이다.

#. 열린 공간으로

재개관 기획전 둘을 열었다. 배다리가 지닌 역사성과 매력을 보여주는데 주제를 맞췄다.

‘배다리 꿈-숙성’이라는 타이틀을 건 전시에서는 작가들의 눈에 비친 지역 특성을 다뤘다. 5명의 작가가 8월 한달동안 배다리 일대를 들락거리며 작가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작품들을 내보이는 전시다. 드로잉, 사진, 동영상, 일기, 노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한 해석을 시도했다.

‘배다리 역사사진전’은 타이틀 그대로 사진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짚어볼 수 있는 전시다. 영화여자정보고 이성진 교사가 중심이 돼 사진을 모았다.

“제도화된 공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지향점입니다. 공간이 다양해요. 전시를 할 수 있는 화이트 큐브식 공간에서부터 공연 발표장, 다목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자료실까지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개방해놓았습니다.”

각각의 이름도 특별하다. 양조장으로 역사적 의미있는 곳이었음을 환기시키는 명칭을 붙였다. 1층의 공연·이벤트·전시복합공간을 도원역 주변 옛 지명을 따 ‘우각홀’로 명명했는가 하면, 2층 전시실은 ‘시음실’, 영화감상·세미나·토론장 등 다목적 공간은 ‘발효실’, 도서관겸 자료실은 ‘숙성실’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고두밥실’(업무공간), ‘주모실’(주방) 등 다분히 양조장스럽다. “막걸리 만드는 공정과 예술활동의 단계를 연결시켜 명칭을 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뜻을 더해 만든 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재개관 공사에 시민기금이 더해졌음을 환기시킨다.

“특정 몇몇이 출자하는 방식을 넘어 모두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가져보는 의미에서 기금을 모았습니다. 결과, 여러분들이 함께했어요.”

10여년전 미술하는 이들이 모인 ‘지역미술연구모임’에서 출발, 2년만에 미술전문잡지 ‘시각’을 내고, 몇년이 지나 공간 ‘스페이스 빔’을 열었다. 지난 8월 문패를 내리기까지 5년7개월을 구월동에서 ‘소통’을 위해 달려왔다. 이제는 장소를 옮겨 지금까지의 연장선상에서 배다리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려 한다.

“함께 하기에 가능합니다.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요. 제 역할은 미미합니다. 그들과 계속 만들어나가야지요.”

글·사진=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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