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면서 사연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기구한 삶에 그 자신도 기막히다. 이하인(60·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씨는 지난해 ‘전국소년소녀가장돕기 시민연합’ 인천부회장직을 맡았다. 부모형제 없이 자란 한을 풀어 볼 요량이었다.

이씨는 지난해서야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의 얘기를 고모(80)한테 처음 들었다. 아버지 교석(1913년 9월1일생)씨는 UN경찰(수인특경대)이었고, 한국전쟁 중에 전사했다는 말이었다.

전장 터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생모조차 3살 난 하인씨를 고아원에 맡기고 집을 나가 버렸다. 누구하나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해주는 이가 없었던 까닭에 하인씨는 가정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아왔던 터였다.

친할머니의 수소문으로 고아원에서 5살 때 본가로 빠져 나왔지만 하인씨는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학력도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전부였다. 이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다. 낮에는 동인천역에서 구두닦기를 하고, 밤에는 중구 용동 큰우물 요리집에서 잔심부름에 나섰다. 신흥동 강원연탄에서 연탄배달부도, 부평공동묘지 인근 은광에서 노역부로 일했다.

그는 27살 때까지 머슴살이를 했다. 지금의 신명여고 자리에 있던 동일방직 사주의 농장에서 정원사로 일했던 것이다. 이씨는 그 곳에서 나무를 키우고 가지를 자르는 기술을 배웠다.

남의 집 일에 신물이 난 이 씨는 자신의 일을 가졌다. 지게와 인력거에 화분을 싣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웬만큼 돈도 벌어 조경회사를 차릴 정도가 됐다.

잘 나가던 조경 사업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20년 전 보증(20억 원)을 잘 못 서는 바람에 석바위의 지하 2층, 지상 7층 건물을 고스란히 날렸다. 지금에서야 빚을 갚고 허리를 겨우 펼 정도다.

얄궂은 팔자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쫒아 다니는 와중에 느닷없이 경기도 오산시에서 전화 한 통이 날아온 것이었다.

3살 때 집을 나간 생모를 모시라는 얘기였다. 재가한 집안의 자식들이 연락을 끊고 생모를 돌보지 않자 호적에는 여전히 아들로 올라 있는 하인 씨를 찾은 것이었다. 결국 오산시도 하인씨가 사실상 부양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생모를 양로원에 보낼 결정을 내렸다.

하인씨에게 남은 일은 숨진 아버지를 찾는 일이다. 다행히 한국전쟁 당시 동인천경찰서에서 훈련 조교로 있다가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운산전투’에 나가 함께 전투를 했다고 증언을 한 선친의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기 위해 얼마 전 군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아비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불효는 저지를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아들, 딸에게 말할 수 있는 길이 트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억울할 만치 서러운 인생을 살았던 이 씨의 마지막 소망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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