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안을 발의한 한광원 의원에게 감사하지만, 귀향이 확정될 때까지 투쟁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지난 3일 ‘월미도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주민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한인덕(63·여) 월미산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국가와 시 당국에 대한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1952년 표양문 인천시장, 1963년 김정렬 인천시장 등에게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월미산을 점령하고 있는 부대가 철수하면 귀향할 수 있다는 구두답변만 들어야했다. 이후 팔미도 판자촌 등지에서 수십년 살아오다가 70년대 재개발 바람으로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월미산을 근거로 80여 세대 원주민들이 대대로 거주해왔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이주와 인천상륙작전을 겪으면서 40세대 가량 연락이 두절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이 일정부분 평화체제를 이루게 됐지만, 월미산 원주민들은 언제까지 희생을 치르며 지내야하는지요? 300m 앞 고향땅도 못 들어가는 ‘실향민’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어요?”

특별법 발의로 귀향에 대한 교두보는 마련됐지만, 그 배면에는 원주민들의 고단한 행보가 있었다.

1998년에 대책위원회를 구성, 인천시, 국방부, 중구청,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청와대 등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떠넘기기에 급급했던 관계 당국 때문에 마치 ‘탁구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 위원장은 회고했다. 2001년 가을 월미산에서 부대가 이전했지만 ‘관계법령이 없다’는 이유로 귀향은 이루어지 못했다.

한 위원장은 귀향에 대한 본격적 행동에 나섰다. 제적등본만으로는 고향입증이 부족하다는 시의 말을 듣고, 고향에 대한 기록물을 찾기 시작했다. 6개월간 국가기록원, 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등을 뒤졌고 결국 지난 해 7월 조선총독부가 1936년에 작성한 ‘인천부만석동소재 월미도공원지대 무단거주자’ 문서를 찾아냈다.

“책자에 기입된 조상이름을 발견했을 때 기분을 잊지 못한다”는 한 위원장은 “이 문서를 바탕으로 귀향 의지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당시 월미산에 진주한 인민군 때문에 월미산은 아군의 포격대상이 되기도 한 곳이다. 특별법과 함께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한 조명이 필요한 곳이 바로 월미산이다.

김창문 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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