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함이 있다. 콩기름을 먹여 붉은색의 윤이 나는 문서함으로 든든하여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구적인 선비를 떠올리게 하니 문방구를 올려놓고 각종문서나 족보를 보관한다. 은밀한 작은 서랍에는, 버리지 못하는 옛날의 채권이나 은단추를 두기도 한다.

소나무로 된 문서함에는 문아래 쪽에, 불을 당겨주던 관솔을 그대로 두었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나이테는 깊은 호수의 잔물결인 듯 잔잔하다. 영험한 물 속에서 가물치와 뱀이 혼례를 올린다고 ‘혼 불’의 작가는 말했으리라. 허면, 그 한 쌍이 정을 나누는 운우지정의 열락을 물위로 끌어내어 검붉은 바탕의 문서함에 서각처럼 새긴 것은 아닐까. 그것이 관솔로 옹이 져, 문서함에는 더욱 진품의 멋이 살아나는 것일 테고.

약 250여 년 전부터 내려온다지만 어느 조상대에서 물려왔는지는 불분명하다. 검은 손잡이와 불 무늬 장석과 양옆에 세 개씩의 도톰한 단추를 두어 고풍스럽다. 손잡이 밑에 국화무늬는 또 어떤가. 육중한 문서함에 부드러움을 가미시켰다. 글을 읽던 선비가 잠시 머리를 식히려 연당에서 국화주를 마시는 풍류적인 모습이 아니랴.
온돌에서 좌식 생활을 하는 풍습에 맞춰 대부분 키가 낮은 가구들은 간결하면서도 귀티가 난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맞물려 견고함을 보여주는 가구다. 안방가구가 단아하고 차향이 묻어난다면 사랑방 가구는 뚝심 있는 사내의 팔뚝 같아 묵향이 난다해도 그른 비유는 아니리라.

요즘은 깊은 산중에도 버려진 가구들이 있다. 그 모양새를 보며 오솔길을 걷던 내 아이들이, 저렇게 큰 똥을 싸는 새들도 있냐고 한다. 사람의 마음에도 값을 매기는 골동품제도가 있다면 나는 얼마짜릴까. 내 집의 문서함처럼 무게 있고 고풍스런 골동품이 되었으면 하느니 우아한 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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