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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신 삽 '건달농부'...삶을 그리다
인천 강화에 터를 잡고 만화작업을 하는 장진영 작가는 스스로를 ‘건달농부’라고 소개한다. 정식 농부에는 한참이나 미달, 그저 흉내만 내고 있으며 다만 그들의 일상을 작품에 담아낼 때만은 스스로가 농부가 된 듯 하다고 말한다.

김용택 시인은 그의 만화를 보고 “곡식을 대하는 농부의 큰 마음, 이웃을 대하는 농부의 아름다운 인정들이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삶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한다”고 감흥을 옮겼다.

강화에 오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다분히 계급적이었다. 만화의 출발이 청년시절 계급투쟁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최근 그는 보편적인 울림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으로 시각을 활짝 연다. 이제 그의 예술관은 그 중심이 인간문제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이다.

▲‘삽 한자루 달랑 들고’

“늘 운동권 만화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강화에 온 것이 마흔이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는 참담했습니다. 그 이전 일했던 연결 고리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죠.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릴순 없다는 생각에 고민하다 삶의 방식을 바꿔보자 해서 선택한 것이 강화행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이다. 붓을 내던지고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결심으로 저층 아파트 전세금을 빼내 양도면 도장리에 집 지을 부지를 구입,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이전했다.

처음부터 고닮픈 삶의 연속이었다. 초보자라 소작할 논을 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진 것은 몸 뿐, 막노동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주간 신문 연재를 맡았는데 그것도 잠시, IMF를 맞으면서 신문사가 문을 닫아 그마저 정리가 됐다.

어찌어찌해서 격월간지 원고 청탁을 받는다. 생활이 썩 나아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농사와 막일꾼 사이를 오갔다.

“2년을 연재했습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이제 더이상 만화가의 삶에 미련을 두지 말자는 심정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단행본을 엮었죠. ‘삽 한자루 달랑 들고’라고 표제를 붙였습니다. 강화에 와서 좌충우돌했던 나의 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책이 만화가로서 생명을 연장시켜주게 됐습니다.”

그 이전 그의 경력이란 줄곧 노동운동 만화가였다. 몇년의 공백은 이제 무명 대열에 진입시키고 있었다. 이때 내놓은 단행본이 ‘2001년 오늘의 우리만화상’과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안겨준 것이다.

“비로소 운동원 작가라는 딱지를 떼고 대중작가로 탈바꿈한 겁니다. 이를 계기로 일이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내인생에 한줄기 서광이 비쳤어요.”

서울미술고등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강사를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한국농어민신문에서는 농민의 눈높이에 맞는 꽁트연재를 청탁해왔다. 2002년부터 ‘들꽃’이라는 타이틀로 3년을 연재한다. 이를 묶은 것이 ‘무논에 개구리 울고’다. 창작집 ‘건달농부의 농사일기’ 1, 2권을 냈다. 상복이 또 왔다. 그해(2004년) ‘만화저작상’을 받는다.
지난해에는 연재를 접고 단행본 작업에 몰두했다. 해서 ‘건달농부의 집짓는 이야기’ 제 1권을 완성했다. “올해안에 2권을 내려구요.”

▲예술관이 변하다

농부의 삶을 이야기하다보니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울림이 들렸다고 말한다.

노동예술가로 사회운동가로 활동할 당시 주력했던 것은 특정계급의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직설적 표현이었다.

“노동자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던가, 지배계급의 부조리를 폭로한다던가, 인간존재에 대한 접근을 계급문제를 다루는 데서 풀었습니다.”

시골에 와 보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동일하게 자연을 착취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편협하고 불합리함 그 자체였다. 생명 공동체의 소중함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예전이 딱딱함과 냉냉함이라면 이제는 따뜻함이죠. 날은 무뎌졌지만 포용력을 넓히려고 노력합니다. 주어진 삶을 냉랭하게만 담아내기 보다 모순을 극복하고 내일을 살기위해 현실을 보듬고자 합니다.”

최근에는 대중예술 영역에서 만화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에 관심이 닿아 있다. 대중예술이야말로 감염력이 크므로 만화를 통해 그안의 정신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만화문화가 산업적으로 흘러가는 측면이 크지요. 월트디즈니 만화 한편이 갖는 경제적인 효과가 자동차 100만대를 수출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식이지요. 산업적 측면보다 문화적으로 풍부해지는 것이 중요한데 말입니다. 만화문화야말로 정신가치로서 대중예술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지난 2월 사단법인 ‘우리만화연대’ 회장직을 떠맡게 돼 한없이 어깨가 무겁다. 오랜 역사성을 갖은 한국만화가협회에 맞서 작가 등용의 불합리성, 도제시스템의 비민주성, 예술가적 변화모색 부재 등을 들어 변화된 문화지형을 만들자는 기치로 80년대말 출범한 만화작가들의 모임이 우리만화연대다.

“궁국적으로 정부 정책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80년대 저항적으로 만화를 만드는 차원을 뛰어넘어 현실적으로 시민 삶에 활력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돼야 하지요. 할일이 많습니다.”

▲민중문화운동으로 만화를 택하다

인생허무를 느끼던 고교 사춘기 시절 방황을 멈추게 만든 것은, 예술을 하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홍익대 서양화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정작 그림보다는 연극에 빠져 살았다. 연극이야말로 대중을 요소로하는 장르라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내내 극단 동아리에서 연극을 하며 지냈다.

4학년 여름방학직전 한 노동조합으로부터 노동자를 위한 교육용 만화 슬라이드를 만들어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방학내내 작업에 매달려 완성했다.

“우선은 내가 그린 그림이 조합원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뻤지요. 더해서 많은 노동자가 내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때 선을 그었죠. 대중과는 유리된 채 소수 엘리트화를 추구하는 기존의 미술문화 대신, 대중과 함께하는 만화를 택하자.”

졸업후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선배와 미술동인 ‘두렁’을 만든다. 당시 운동권 활동거점인 소극장 ‘애오개’로 들어간다. 많은 민중예술운동가와 계급투쟁의 선봉에 섰다.

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가 결성되면서 2년동안은 꼬박 제작부장을 맡아 상근을 했다. “이름이 좋아 부장이지 그야말로 노가다꾼이지요.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숨겨진 진실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선전활동이 주업무였습니다.”

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민중예술분야도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 인다.

“만화영역의 경우 재정적 뒷받침이 없다보니 인쇄가 조악했죠. 이젠 전문성을 갖고 대중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진보적인 만화운동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모아 창작실 ‘작화공방’을 꾸렸습니다.”

95년 문을 닫기까지 이곳은 문화운동의 터가 됐다. 주간 노동자신문 연재는 계속 해나갔다.

“문화일보로부터 연락이왔습니다. 시사만평을 맡아달라는 제의였어요. 운동권의 비화법 만화를 제도권에서 스카웃한 겁니다.” 노동자신문을 접고 시사만평 ‘삽사리’ 연재를 시작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딱 1년뒤 문화일보가 내부적 혼란기를 맞자 스스로 정리하고 나온다. 같은 시기 ‘작화공방’도 문을 닫고야 말았다.

“활동 기반을 동시에, 전부 잃어버린 겁니다. 공황 상태에 빠졌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삶의 방법을 바꾸자,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자 해서 선택한 것이 농부로서 강화행이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돌아온 위치는 만화를 그리는 일이다. 하나 더 얻은 것이 그의 표현대로 ‘건달 농부’다. 아마도 올해말이면 그는 단행본 ‘건달농부의 집짓는 이야기’ 2편을 내밀며 예의 환한미소를 지을 것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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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은…

▲1956년 서울 출생 ▲1976년 홍익대 서양화과 입학 ▲1982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 ▲1985~1986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제작부장 ▲1988~1995년 만화 창작실 ‘작화공방’ 운영, 만화책 ‘하이 노틀러’ 등 발표 ▲1990~1994년, 1996~1997년 주간 ‘노동자 신문’ 7년간 연재 ▲1994년 문화일보 시사만평 ‘삽사리’ 1년 연재 ▲2001~2004년 서울미술고등학교 교사 ▲2002~2005년 한국농어민신문 단편극화 연작 ‘들꽃’ 연재 ▲현 (사)우리만화연대 회장, 상명대 겸임교수, 인하대 강사 ▲단편 ‘멋쟁이 우리형’, 장편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나선’, 창작집 ‘삽 한자루 달랑 들고’ ‘무논에 개구리 울고’ ‘건달농부의 농사일기 1, 2’ ‘건달농부의 집짓는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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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만날 사람 /김병균 극단‘동이’ 대표

내가 아는 김병균은…

오랫동안 인천지역을 터로 주민을 위한 연극을 만들어 왔다. 결국 문을 닫았지만 소극장 ‘가온누리’를 열어 지역 연극 부흥을 위해 고군분투 했다. 지난 5월엔 뮤지컬 ‘나비’로 다시한번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연배는 아래지만 문화를 지점으로 해 만난 10년지기다. 술 친구이자 만나면 항상 즐거운 사람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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