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이냐? 병원이냐?” 부평미군부대 부지활용 방안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반세기 이상 치외법권이었던 곳이 머잖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만큼 당연한 터일 것이다.



(▲미군부대를 둘러싸고 있는 부평지역의 고층아파트(부평구청 사진제공))

많은 전문가들은 이 곳의 활용방안에 따라 부평이 ‘군사도시’나 ‘회색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부평미군부대의 역사와 이 땅이 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지 두 차례에 걸쳐 점검한다.

작전명 ‘베이커 포티(Baker Forty)’. 이는 부평과 미군의 만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미 제24군단장 하지는 주한미군점령군사령관의 직책으로 남한점령 임무를 시작한다.

24군단 예하부대 가운데 인천을 점령하도록 지시받은 부대는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24). 약칭 애스컴(ASCOM24)으로 불린다. 이 해 9월10일 애스컴은 일본의 주요 보급창이었던 부평 조병창을 접수한다.

조병창 시절부터 애스컴까지 한 평생을 근무했던 최모(82·부평구 산곡동)씨는 “부평평야는 안개가 많이 끼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 일대가 폭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회상한다.

애스컴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철수했지만 1951년 재주둔에 성공한다. 병참기지와 121후송병원으로 재구성한 애스컴은 1963년 55보급창·6의무보급창, 565공병자재창·19병기창, 4통신대, 512정비대대, 55항공대, 8057보충대, 37공병대·76공병대 등 7개 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종합보급창 역할을 한 55보급창은 종업원 1천200명을 고용, 한국 내 단일 부대 중 최고의 인력을 자랑했다. 1970년대 들어 애스컴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미국 닉슨 대통령이 추진한 데탕트(detente), 즉 해빙정책의 분위기가 한국에까지 이어져 주한미군 7사단 철수가 전격 이뤄진 것.

김현석 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은 “1972년 동서독 간 기본조약 체결에 이어 남한과 북한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국민들 사이에 금방 통일이 되는 분위기가 퍼지게 됐다”고 말했다.

애스컴이 공식적으로 업무를 마감한 것은 1973년 6월30일. 각 부대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되면서 ‘캠프마켓’이 대신하게 됐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애스컴의 정확한 면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재 캠프마켓(61만5천㎡)의 4∼5배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방부에 넘겨진 옛 애스컴 부지들은 부평의 도시지형을 새롭게 바꿔놓았다. ‘인천의 도시계획 연혁집’에 따르면 1978년 건설부는 산곡동 310 일원 12만5천㎡를 아파트지구로 결정했고 시는 1984년 33만7천30㎡로 확대 지정고시한다.

이렇게 해서 1985년경 ‘산곡지구’ 현대아파트가 탄생했다. 부평에서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고층아파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어 우성과 동아, 대림, 경남아파트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캠프마켓 정면에 자리잡은 신촌(부평3동) 지역도 이 대열에 합류할 기세다. 이렇게 되면 반환되는 미군부대부지 주변을 고층 아파트가 빙 둘러싸게 되는 셈이다.

김현석 연구원은 “미군부대 덕분에 부평이 한 때 경제적 전성기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리 땅안에서 철저한 방외인일 수밖에 없었다”며 “이 부지 이용계획은 시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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