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이라고 볼 수조차 없었던 보잘 것 없던 승기천의 물줄기는 남동공단 때문에 생겼고, 바뀌었다. 1980년 신군부의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인천과 김포지역의 공단조성계획을 확정하고, 수도권문제 심의위원회에서 이를 의결했다.



(▲인천시 남동구와 경기도 시흥시의 소래를 연결하는 수인선 철교)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의 공장이 갈 데가 없자 인천 등지를 공장이전을 촉진지역으로 묶었던 것이다. 사실 이전 대상 업체는 공해성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공단조성 대상지 가운데 요지는 역시 인천시 남동 폐염전 자리였다. 서울서 30km, 인천항에서 7.2km, 게다가 경인고속도로로부터 6km로 위치적 최적이라는 이점이 작용했다.

정부는 1984년 4월 경제장관회의를 통해 토지개발공사(현재 토지공사)를 사업시행자로 결정했다. 남촌·도림·논현·고잔·동춘동 등지 남동염전이 소금밭으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잃은 것도 이 때부터다.
토개공은 1985년 2월 인천시로부터 공유수면매립면허를 받았다.

총 1천700억 원을 투입해 280만9천497㎡의 매립지와 염전, 농지 등 총 면적 956만5천536㎡에 이르는 공단 터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남동염전 85만 평은 공업용지로 바뀌어 공단조성 터에 포함됐다. 이 때 시흥시의 군자염전 120만 평도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의 시화지구 개발에 편입됐다.

6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중공업 정책으로 공해 공장들이 들어서 있던 인천의 환경은 남동공단 조성을 기점으로 더 악화됐다. 1985년 10월 인천시는 1천896개 공장 가운데 90.6%인 1천718개가 ‘공해 공장’이라고 발표했다. 정부를 상대로 더 이상 인천에 ‘공해 공장을 입주시킬 수 없다’는 의지를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천시는 남동공단에 입주한 화학업종 업체들로 인해 환경이 더욱 나빠지자 1989년 비상대책을 내놓았다. 남동공단 2단지에는 화학, 섬유 등 20개 공해 업체의 입주를 제한해 공해발생을 막겠다고 발표하고 이를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인천시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공부가 이듬해 7월 인천시의 발표와 건의를 묵살하고 만 것이다.

거대한 매립사업을 통한 남동공단 조성과 이에 따른 공해업체 입주로 파생한 주민들이 부담해야 할 몫으로 돌아갔다. 1988년 7월에는 연수구 동춘동 앞바다 2천㏊에 어패류가 떼로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인천시와 환경청, 국립수산진흥원 등이 원인규명에 나섰다. 조사결과 어패류의 폐사원인은 남동공단에서 버려진 폐수의 유입으로 밝혀졌다.

산업구조 개선이 제기되는 인천 최대의 국가산업단지, 남동공단은 인천의 가장 큰 오염원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남동공단에 입주한 업체들이 생산 활동을 하면서 내뿜는 질소산화물과 미세먼지 등 기준성 대기오염 물질량은 엄청나다.

이곳을 드나드는 차량들이 배출하는 대기오염 물질까지 감안하면 인천 전체 오염부하에서 남동공단이 차지하는 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선 남동공단이 배출하고 있는 화학물질의 양을 따져도 그렇다. 남구 도화동과 서구 가좌동을 끼고 있는 인천지방산업단지의 입주업체들이 배출하는 화학물질 배출량은 연간 4.9t이다.

남동공단은 배출하는 화학물질양은 연간 470t으로 인천지방산단의 96배에 이른다. 이는 인천 전체 화학물질 배출량의 36%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남동공단은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국내 80여개 공업단지와 공업지역 중 17위에 올랐다.

화학물질 배출량은 국내 최대의 석유화학단지인 울산 미포와 여수 산업단지가 각각 4천t과 2천t으로 가장 많았다. 또 남동공단과 가장 가까운 시화공단은 111.2t으로 30위를 차지했다.

‘환경호르몬’으로 부르는 내분비계 장애물질의 경우 남동공단의 연간 배출량은 2.2t으로 일정수준의 양을 배출하는 전국 20여개 산업단지와 공업지역 가운데 12위로 나타났다.

인천의 전체 화학물질 배출량은 메틸알콜을 배출하는 종이제조업과 톨루엔을 내뿜는 섬유업이 발달한 대구와 석유화학 산업의 비중이 높은 울산에 이어 전국 7대 도시 중 세 째로 많았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드넓은 소금평야' 추억 저편으로


1930년대부터 남동염전 일대 연 15만t 생산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남동구 남촌동~논현동 등지 커다란 갯골과 맞닿아 있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구한말까지 이 동네는 ‘염말’이라 불렀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 밭이 많았기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1930년대 초 남동염전이라 불렀던 이곳을 포함해 소래, 군자 등지는 전국에서 제일 큰 소금밭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됐던 소금은 연간 15만t에 달했다.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이르는 양이었다. 당시 일제는 인천출장소를 세워 염전과 그 곳에서 생산된 소금을 관리하면서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수인선은 소금 때문에 생겨났다. 1937년 8월6일 ‘꼬마열차’ 수인선 협궤열차의 첫 기적소리가 울렸다. 조선경동철도(주)가 공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수원역~ 인천시 중구 신흥동 삼익아파트 인근에 있던 남인천역까지 총 52㎞에 이르는 철도 부설공사를 끝마친 것이었다.

본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수인선은 1931년 개통한 수여선(수원∼여주 간 74.3㎞)과 맞닿아 있어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여주이천 쌀의 수송도 맡았다. 수인선은 해방 후 사설 철도와 부대시설 국유화 조치(1946년 5월10일)로 다른 철도와 함께 국가에 귀속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15개 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던 수인선은 이때부터 급격히 사향세로 들어섰다.

쌀 수송의 의미가 거의 사라진데다 다른 염전지대의 확장과 물량 확대, 버스와 트럭 등 대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수인선의 승객과 화물이 눈에 띄게 줄었던 것이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자 철도청은 1973년 11월 송도~남인천간 5.9㎞의 운행을 중단했다. 수인선은 1년 전에 이미 끊긴 상태였다. 1992년 7월에는 소래역~송도역 운행을 끊었고, 1977년부터는 수인선에서 화물운송이 사라졌다.

수인선 복선전철화 계획을 구체화한 1994년 9월에는 한양대 안산캠퍼스~송도역 26.9㎞ 구간을 폐쇄하고 수원∼한양대역까지만 열차를 운행했다.

철도청은 하루 평균 이용객이 250명에 불과해 적자가 연간 20억여 원에 이르자 1995년 12월3일 여객운송도 중단했다. 수인선 전 구간이 완전 폐쇄한 것이었다.

수인선 완전 폐쇄의 아쉬움은 ‘꼬마열차’에 얽힌 진한 추억을 이어졌다. 표준궤도 열차의 절반 폭(76㎝) 밖에 안 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꽃으로 정을 나눴던 협궤열차안의 풍경,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에서는 손님이 내려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했던 기억, 92년 7월까지 송도역 주면에서 열렸던 아낙들의 ‘반짝시장’, 지난 90년10월 화성군 매송면 야목 건널목에서 협궤열차와 소형버스가 부딪혀 꼬마열차가 넘어지고 만 웃지 못 할 일…

그러자 실현되지 않았지만 인천시는 2000년 하반기부터 수인선 ‘꼬마열차’를 관광열차로 운행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당시 시는 의왕시 철도박물관에 보관 중인 협궤열차 중 2~3량을 들여오기도 했다. 남동구청 앞에 전시한 열차가 바로 이것이었다. 꼬마열차는 2009년 수인선 전철로 그 부활을 꿈꾸고 있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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