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자유공원 정상에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개항기에 그 자리에 건립되었던 존스턴별장이라고 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근대건축의 망령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천 시내를 활보한다는 제보가 접수되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근대건축의 망령이라니.S교수는 연구실을

비우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갔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참이다. 장마 끝의 하늘은 시퍼렇게 달아올라 있었다. 복도 끝에 뚫린 창문바깥으로 펄펄 끓는 햇볕이 씩씩 소리를 내며 지면을 데우고 있다. 다행히 여름방학을 맞은 캠퍼스엔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물었다.

“어이, 금양. 여긴 어쩐 일이쇼?” 등 뒤에서 S교수의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성동 3가 2번지. 1903년 착공하여 1905년 완공된 존스턴 별장은 응봉산 정상에 영국인 사업가 존스턴이 자신의 여름별장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1919년까지 존스턴의 소유였으나 그가 죽은 뒤 발터가 소유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히로자와, 야마쥬, 가다구라에게 차례로 매도되었다가 1936년 2월 21일에 인천부가 매입해 ‘서공원회관’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 후 ‘인천각’으로 개칭되며 1936년 7월 26일부터 일본인들을 위한 고급여관 겸 요정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층에는 대·중·소 식당이 있었고 2층에는 6개의 객실이 있었다.

해방 후 미군장교 기숙사로 쓰이다가 6.25전쟁 당시 포화에 의해 건물의 일부가 파괴된 모습이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사진에 남아있다. <손장원,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 간향미디어랩, 2006>

어디부터 탐문해야 할까 고민하다 찾아왔다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호방하게 웃기를 좋아하는 그는 지금 인천이 제정신이 아니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거 아녜요? 지금 존스턴 별장을 복원하자고 떠들어대는 이들 말예요. 어린 시절의 환상을 담고 있는 추억의 공간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때 저들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 같아요? 해방 후 태어난 저들이 기억하는 그 공간은 이미 치욕의 세월이 지난 뒤였단 말이죠. 그래서 저들이 날뛰는지 몰라요. 다분히 부모 손잡고 그 집을 지나가면서 가졌던 행복한 건축의 추억 말이죠.”

그나마 그 행복한 시절조차 경험하지 못한 후배세대의 맹목적이고 무모한 편집증과 추종에 대하여 그와 나는 생각을 같이 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말인즉 이미 그 공간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과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라는 역사적 기념물이 그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조형물임에 저들의 의도는 그것들을 훼손시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촉발시킴으로써 인천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개입되어있다는 것이었다.

S교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애써 참아가며 말을 하였지만 부글부글 속이 타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는지 벌컥벌컥 생수를 들이켰다.

8월, 광복의 기쁨이 우리의 산하를 뒤덮은 계절에 인천만은 처참했던 과거를 잊은 채 속없는 인간들의 추억을 담보로 한 행복한 건축을 되뇌며 ‘창조적 복원’의 논리를 앞세운 행정가는 그 안에서 인천의 세계성을 발견하고 있는 형국이라니…S교수의 연구실을 빠져나오면서 나의 머릿속은 인천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행로가 생각 외로 험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고 해도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원형을 추정에 의해서 진행하는 복원 혹은 수복은 현대에서 새로운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대학에서 건축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W교수의 말이 허공을 가르며 스쳐 지나갔다. <계속>
글: 전진삼(건축비평가)

등장인물
S교수(실명:서규환)=1953년 경북 경주 생. 사회과학박사, 인하대 교수이며 정치학 및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다. ‘정치적 비판 이론을 위하여’, ‘비판적 현대성의 정치적 이론’, ‘현대성의 정치적 상상력’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때 지역에서 발간되는 계간 ‘황해문화’의 편집주간을 역임했다.

▲W교수(실명:우동선)=1965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 ‘서양근현대건축의 역사’, ‘건축사학사’, ‘연전연패’ 등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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