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96년 북한의 대홍수와 식량난으로 촉발된 남한의 범국민적 북한동포돕기 운동은 적대적 남북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지렛대였다.

97년 3월 본격화한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의 범국민적 북한동포돕기 운동 이후, 민과 관의 남북 교류는 핵문제를 비롯한 위기와 굴곡에도 불구하고 질적, 양적 발전을 이뤄갔다.

이는 금강산 개방과 정부의 대북지원, 6·15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남북관계 개선과 인적·물적 교류의 바탕이 됐다.

북한동포돕기 참여자들은 위기의 북한동포를 돕는 민간 운동이 남북 당국간 정책 차원으로 연결돼 민족 통일의 초석이 되기를 기원했다.

식량난에 죽어가는 북한동포를 돕는 운동은 어떤 구호의 통일운동 보다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기회였다.

95년과 96년 여름 연이어 터진 대홍수는 북한의 식량난을 가속화해 매우 심각한 지경으로 몰아 넣었다.

97년 가뭄까지 겹친 북한에 주식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옥수수 수확량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97년 초까지 기아와 질병으로 최소 100만명 이상의 주민이 묵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됐다.

정부는 97년 3월, 금지해온 민간차원의 대북 쌀 지원을 허용하고 기업차원의 대북지원도 적극 허용키로 했다.

군용미 전용 가능성을 이유로 민간의 쌀 지원을 불허해온 대북정책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

종교·시민단체의 북한동포 돕기 운동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등 6대 종교단체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경실련, 흥사단 등은 97년 3월27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북한동포 돕기 옥수수 1만t 보내기 범국민 캠페인’을 전개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자체 조직을 통해 북한 식량지원 활동을 펴온 종교단체와 시민단체가 범국민운동으로 결합함으로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민주노총과 YMCA등 56개 시민·노동·사회단체도 ‘겨레사랑 북녘동포돕기 운동’ 이름으로 대규모 북한동포 돕기운동을 전개했다.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지역인사들은 97년 4월14일 ‘북한동포돕기운동 인천본부’를 발족했다.

인천본부에는 우리밀살리기 인천본부, 인천종교인협의회,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경실련,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 등 61개 시민단체가 대거 참여했다.

황보윤식 우리밀살리기 인천본부장, 홍성훈 환경운동연합 대표, 오순부 부평시민모임 대표 등 8인의 공동대표가 선출됐다.

인천본부는 5, 6월 집중적인 모금과 식량의 긴급지원책을 강구하는 한편, 강연회를 통해 시민들에게 북한동포들의 굶주림 실태와 심각성을 제대로 알리려 노력했다.

인천본부는 북한돕기 운동을 4개항으로 집약해 사업을 추진했다.

쌀과 옥수수 등 식량 긴급지원, 의약품 모집, 식량증산을 위한 기술지원대책,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 촉구 등이 그것이다.

인천본부는 20여일만인 5월6일 1차로 회원·단체 중심으로 3천87만원을 모금해 ‘겨레사랑 북녘동포돕기 운동’에 전달하고 2차 거리모금에 나섰다.

7일에는 북한을 여러차례 방문한 미 컬럼비아대 린튼 박사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인 법륜스님을 초청, 강연회를 열어 북한 현지의 식량 사정을 전했다.

5월27일에는 참여단체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굶주림의 고통 나누기를 위한 ‘겨레사랑 옥수수죽 먹기’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통일강냉이 보내기 모임’ 김재오 전도사가 북한 실상 보고회를 가졌다.

인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4월22일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가톨릭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옥수수 1천톤 보내기를 목표로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자기수입의 0.3%를 기부하거나 북한주민 한달 식량비인 3천원 1계좌 갖기 범시민운동을 벌였다.

이칠우 인천기독교연합 총회장, 이도해 인천불교연합회장, 김수경 인천여성단체연합회장 등 26명이 공동대표로 선출됐다.

인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도 5월27일 ‘북한의 식량위기를 염려하는 인천사회 각계인사 만찬’을 열고 동포의 기아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북한 옹진군을 지정기탁 지역으로 선정하고6월12일 ‘북한 옹진군 동포돕기범인천시민협의회’를 발족, 9월 들어 옥수수 1천톤을 지원했다.

인천대 김학준 총장이 제안해 구성된 ‘북한동포에게 옥수수 보내기 인천시민모임’도 5월8일 준비모임을 갖고 옥수수 2천톤 구매를 목표로 사업을 시작했다.

김병상 신부, 황순록 한국노총 인천본부장, 원영무 전 인하대총장 등 27명이 공동위원장에 위촉됐다.

시민모임도 옥수수 2천톤을 황해도민에 지정기탁해 보냈다. 시민모임은 5월22일 김상복 아세아연합신학대 교수를 초청 ‘북한의 식량사정과 민간단체의 역할’을 강연하고, 6월12일 옥수수죽 먹기 행사를 열었다.

98년 들어 북한의 아사자 수는 줄어들었으나 식량난에 누적된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여전히 사망자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금식의 날’을 조직하고 4월25일 남한의 25개 도시를 포함, 36개국 107개 도시가 참여하는 국제 금식의 날 행사를 동시에 개최했다.

한국위원회는 금식의 날을 개최하면서 “북한동포를 살리기 위한 행동은 바로 이 땅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인천에서는 4월21일 종교, 대학, 환경·문화·노동·여성단체, 청년·새마을지도자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하는 106개 단체의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금식의 날 인천위원회’를 출범시키고 4월25일 인천 가톨릭회관에서 금식행사를 함께했다.

통일부장관는 이날 서울 행사에 참석, 긴급한 구호차원의 대북지원은 물론, 북한의 식량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나가겠다고 밝혔다.

- 90년대 인천지역 통일운동

90년대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의 통일운동은 북측과의 ‘회합, 통신’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 가운데 ‘평화통일 시민한마당’, 통일노래제 등 문화 행사와 통일교육, 강연회 등의 방식으로 전개됐다.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던 지역의 통일 운동과 행사는 또한 서울서 열린 전국 규모의 민족대회를 축으로 추진됐다.

90년 8월15일 열린 제1차 범민족대회에서 문익환 목사 등은 민족통일의 대연합전선 운동체로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을 본격화했다. 범민련이 주최한 범민족대회는 이후 남, 북, 해외 3자 연대방식으로 서울과 평양, 독일 베를린 등에서 동시에 열렸다. 남한의 범민족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극한 대치와 충돌 속에 치러졌다.

93년 4차 대회부터 지역별로 범민족대회추진본부 지역추진위가 구성돼 지역행사를 열었다. 인천에서는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을 중심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인천시민모임’을 구성하여 92년부터 8·15 통일행사, 12월 ‘통일의 밤’ 등 문화, 가요제를 통해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95, 96년에 걸쳐 8·15 민족대회는 분열됐다. 94년 재야운동의 중심에 있던 전국연합이 단일 연합기구인 범민련에서 빠져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라는 별도 조직을 구성한데 이어 96년 8월 결국 ‘제1회 평화통일민족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두 단체는 연방제통일안과 미군철수 등 쟁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민족회의측은 학생위주의 범민련 통일행사가 민족대회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해왔으며, 정치적 구호 보다 대중적 행사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차원에서 전국규모의 범민족대회에 어떻게 참여하고 결합하느냐가 중요했던 인천지역 단체들은 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분열을 앞두고 96년 8월초 2차례에 걸쳐 ‘하나의 대회를 위한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8·15대회 추진을 위한 인천지역 제단체 연석회의’ 명의에서 이들은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많은 단체들이 8·15 중앙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아왔다”며 통일 역량의 단결을 호소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연석회의는 민주노총인천본부, ‘노동자통일대 백두’, 인천연합, 인천부천대학총학생회연합(인부총련), 통일을여는 민주노동자회, 민족사랑청년노동자회, 범민련남측본부 인천경기서부연합(준) 등 11개 단체가 참여했다.

범민족대회에 인천에는 93년 현장 노동자들로 결성돼 통일강연, 통일교육, 분단선기행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백두’와 인부총련 학생들을 비롯, 인천연합 등 연석회의 소속 단체 활동가들이 참여해왔다.

97년 8월10일 ‘한반도평화와통일을염원하는 인천시민모임’은 ‘평화통일민족대회 인천지역추진본부’를 구성하고 월미도에서 ‘97 평화통일 인천시민한마당’을 개최했다. 인천추진본부에는 4개 종단 종교인들과 녹색연합, 여성의전화 등 시민단체, 인천연합, 민주노총 등 사회·노동단체, 야당 시의원 등이 폭넓게 참여했다.

그러나 이해 8월에도 서울에서는 제2차 평화통일민족대회가 조선대에서는 제8차 범민족대회가 따로 열렸다. 따로 열린 대회에도 인천지역 일부 통일운동단체와 학생들은 나누어 참석하기도 했다.

이에앞서 97년 5월 대법원은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했다. 인천지역에는 범민련 경기서부연합(준)에 일부 구성원들이 활동하던 ‘민족사랑청년노동자회’가 이적단체로 지목돼 98년 12월 간부들이 경찰에 의해 구속됐고 이듬해 이적단체로 판결받았다.

그러나 범민련 활동가들을 포함, 인천지역의 통일운동 단체들은 2000년 6·15 선언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아 2004년 인천서 열린 6·15 4돌기념 우리민족대회를 개최하며 6·15 선언의 실천을 위한 지역차원의 통일 운동을 확장해간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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