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는 인간에게 거주지를 제공했고, 인간은 거기에서 삶을 영위하고 역사를 잉태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과 대지의 표피적 모습만보고 쉽게 감동하거나 또는 절망한다. 그 이유는 대지(풍경)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우리 육체의 외양이 표피적 시선 안에서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우의 작품은 이러한 대지와 인간, 그리고 이의 관계에서 비롯한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표피적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대지, 대지에 살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존재자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풍토성을 인식론적 사유의 주된 테제로 상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 ‘황야’는 현재는 척박한 땅이지만 한때 문명(인간)의 땅이었을 수도, 향후 문명의 땅이 될지도 모르는 곳을 그린 것이다. ‘역사성(시간성)’의 지표로 선택된 길(路)이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고 화면의 분할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그루의 가시나무가 그림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이 땅의 원주민이라고 소개한 이 나무는 화면의 주인공, 즉 존재자이다. 이 나무가 없어지면 이 땅은 그야말로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 될 것은 물론이다.

한편 우리가 필히 주목해야 할 곳이 화면 왼쪽의 나무상자다. 무릇 상자라는 것은 판도라의 그것에서 보이듯이 인간 호기심의 상징이자 사건의 매개자이기도 하다. 또 김알지의 설화에서 보이듯이 잉태와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이 척박한 땅에서 다시금 역사와 문명의 싹이 잉태하고 있음을 시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황야’가 문명의 가능태로서의 대지라면 ‘마을’은 완성태로서의 대지를 그린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름답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스산한 느낌이 감돈다.

전반적으로 회갈색의 무채색조가 화면을 차지하는 가운데, 인형이랄지 인간이랄지 모를 대상이 화면의 전면부를 차지하고 마을은 대지 저편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누렇게 변한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면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듯 한 풍경에서 작가는 이 마을을 숨은 역사를 본다.

이렇게 박인우는 동일한 대상을 보더라도 우리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 데, 이는 가히 편집증적이다. 이는 아마도 어떤 대상을 대하는 작가적 인식이 우리의 보편적인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발육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에서 대상(풍경)은 하나의 독특한 역사를 공간에 담고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환경에 내재된 역사와 작가의 의식 안에 자리한 기억이 그 풍경 안에서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가천의과대학에 재직 중이다.

이경모 인천대 겸임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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