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하역의 기계화는 항만 현대화에 따르는 필연적인 일이었으나 항만하역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위기 대책의식은 이에 반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기계화의 진전으로 노동 강도는 감소돼 부두근로자들의 근로영역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들 항만하역의 기계화는 확산되기 시작했다.

◆인천내항 준공

특히 1966년 인천항 재개발 사업이 착수된 이후 7년여 만인 1974년5월10일 인천내항공사가 완료됐다.




(▲1974년 내항개장과 함께 등장한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전용부두인 4부두. 당시 대표적 기계화부두였던 4부두는 항운노조에게 상당한 위협요인이 됐다.)

내항의 완공으로 인천항은 4천500t급 7척에 불과했던 접안시설규모가 5만t급 등 25척이 접안가능하게 됐고 하역능력도 142만t에서 627만t으로 증가했다. 갑거내 내수면적은 공사전 9만9천㎡에서 140만㎡로 확장됐다.

인천항 전면 도크화는 객선부두와 어항이 모두 연안부두로 이전돼 인천항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켰다.내항 개장은 부두근로자들의 작업형태를 변화시켰다. 외항에 정박한 선박의 화물을 부선을 이용해 내항으로 실어 나르던 부선작업이 사라지게 됐다.

이전까지 최대 10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작업의 대부분을 선박이 외항에 정박하면 부선이 가서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이 부선작업은 인천항 개항이래 90여년을 이어져온 작업으로 부두근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내항 개장으로 부선작업이 사라지고 부두에 기계화 장비 도입으로 부두근로자들의 맨몸으로 하는 하역작업방식은 점차 사라지게 됐다. 부두노조 인천지부는 직능별 지역별 조직에서 기업별 조직으로 재편성 했다.

부두별로 설치했던 분회를 해체하고 기업을 중심으로 13개 하역회사에 7개의 분회와 뗏목편성을 하는 특수기능자로 특수분회를 설치했다. 조합원의 취업기회를 확대하여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육상, 해상작업반을 통합해 적정인원으로 작업반을 재편성해 작업반에 소속된 조합원은 전원이 같이 취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내항 완공후 외항하역이 내항하역으로 바뀌면서 작업체제뿐 아니라 하역요율도 재조종이 불가피했다. 당시 항만하역은 동일한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작업임에도 관수물자와 민수물자의 하역요율이 각각 달리 적용되는 불합리성이 있었다.

인천지부는 1974년 7월 31일 인천하역협회에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 하면서 민수, 관수작업임금을 일원화 할 것을 건의 했다.하역요율은 교통부에서 심의하여 인가하고 있으나 관수물자의 하역요율을 화주인 정부 각 부처에서 책정하면서 예산에 직접 관계되기 때문에 각 부처별로 그 기준을 달리하고 있어 농림부요율, 국방부요율, 보사부요율, 조달청요율 등으로 각기 산출기준이 다른 하역요율이 적용됐다.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에 대해 인천하역협회는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원칙을 인정하여 당국에 하역요율 개정을 신청했고 1975년7월16일 하역요율이 통일되어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이 실현됐다.

이로서 하역요율의 다원화 시대는 끝나고 단일요율에 의한 단일 임금제가 실현되어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제도가 확립되었다. 요율이 낮은 관수요율을 요율이 높은 민수요율에 일치시키므로서 1975년도의 임금인상은 예년의 평균임금 인상률을 훨씬 상회했다.

내항완공이후 하역회사들의 기계화가 급진전도면서 위기를 느낀 전국부두노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75년5월30일 ‘항만하역 기계화에 관한 포럼’을 개최했다. 이 포럼은 ‘항만하역 기계화 및 실업’ ‘항만하역 요율과 임금문제’라는 2개의 주제 발표와 종합토론으로 진행됐다. 이어 노조는 1976년6월 ‘항만하역기계화대책연구"라는 기계화 백서를 발표했다.

◆복지후생의 향상

부두근로자들은 하역작업의 파동성과 도급제 임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용근로자로 간주되어 근로기준법에 규정한 퇴직금의 적용을 받지 못했다. 인천지부는 1978년 퇴직금 제도를 수립해 부두근로자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

인천지부는 내항완공후 임항지역이 대폭 정비되자 항만 지역 내 조합원들의 종합적인 후생복지시설을 마련해 문화적인 노동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했고 정부의 배려와 사업체 협찬으로 1976년 ‘근로자의 집’을 준공했다.

인천지부는 근로자의 신용사업을 위해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해 1975년12월 출자금 2만3천500원으로 신협을 출범시켰다. 인천항근로자신협은 1976년 정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창립 10년여 만에 조합원 2천500명, 조합자산 10억원으로 발전했다. 신협은 신용사업을 주 업무로 하는 한편 구판부를 설치해 일용품을 생산 공장에서 직접 구입해 공장도 가격으로 공급하면서 조합원들의 건전한 소비생활을 영위하도록 했다.

인천지부는 1977년2학기부터 조합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수여하면서 장학사업을 본격 시작했다. 장학사업은 인천지부와 대한싸이로 주식회사가 1975년3월 양곡하역기계화에 대한 협정에서 작업단계가 축소된 부분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보장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인천지부는 이 기금을 공제기금, 의료보건기금, 장학기금으로 분류해 적립했고 1977년도에 이르러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인천항운노조 출범

전국부두노조는 1979년6월 전국항만노동조합으로 개칭되었고 1980년12월 국보위는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노동관계법에 따라 전국항운노동조합은 1981년2월17일 전국운수노동조합과 통합해 전국항운노동조합으로 확대 개편됐다.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모든 노조가 산업별 노조에서 기업별노조로 개편됐으나 항운노조는 노조가 독점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감안되어 지역별노조와 클로즈드샵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작업권을 확보하고 노동력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조직력을 강화할 필요가 절실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81년2월 인천항만지부와 인천운수지부도 통합절차를 밟아 인천항운노동조합으로 출범했고 종전의 분회를 폐지하고 각 사업장마다 연락소를 설치했다. 인천항운노조는 1981년8월5일 1차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이강희 위원장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이강희 위원장은 이후 2003년5월23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최정범위원장이 선출되기까지 만21년9개월간 노조를 이끌었다. 이 위원장의 재임기간은 부두근로자가 노동조합을 출범시킨 이후 최장수 기록이다. 위원장 임기가 불과 1~2년에 불과했던 과거와 비교할 때 이위원장은 전무후무하게 노조를 이끌며 오늘날 상용화체제 출범의 밑거름이 됐다.

이 위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조합원들이 작업장을 고정적으로 배치되던 것을 순환제로 전환시겼고 임금을 동일화했다. 시행초기 물동량이 많아 임금이 비교적 많은 곳에 근무했던 상당수의 조합원들이 반발하는 일이 있었으나 체제변화는 성공했다. 순환제 시행이후 조합원들의 임금은 대부분 비슷해졌다.

순환제는 조합원간 임금격차를 해소하고 결속력을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인천항운노조의 결속력은 상급단체인 중앙항운연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위상이 커졌고 1997년 부두운영회사제시행, 1998년 평택항 개장 등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위원장의 바턴을 이어받은 최정범위원장은 이후 밀어닥친 정부의 강력한 상용화 추진에 노조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여 조합원들을 결속시키고 대정부 활동을 강화했다.

인천항운노조는 이위원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의 굴곡 많은 역사를 순탄하게 거쳐 왔다면 최위원장 시대 이후 모든 의사결정이 조합원들의 뜻을 존중하는 민주화가 실현됐다. 이같은 민주화는 이위원장 시대 조합원찬반투표 찬성률 99%라는 독선적 결과시대를 벗어나 찬반이 엇비슷해 집행부가 조합원들의 마음을 읽어야하는 시대로 변모했다.

백범진기자 bjpaik@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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