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근로자들은 광복 이후 미군정, 6.25 전쟁, 4.19 의거, 5.16 군사쿠테타 등 역사적 대혼란기에서도 하역작업 현장에서 끊임없이 작업을 하면서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부두 근로자들끼리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는 조직적인 혼란속에서 근로자 스스로 조직을 정비하고 재건하면서 인천항에서 확고한 독점적 노무공급 체제를 확보해나갔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

해방을 맞아 국내 사회와 경제가 극심한 혼란속에 생산이 위축되고 물자유통이 경색된 가운데서도 인천항은 미군 항만사령부가 주둔하면서 화물 수송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석제부두(1960년대) - 월미도 다리 전면을 매립하여 축조한 석제식 물양장으로서 현재 제 7부두(양곡전용부두) 이다)

미군정은 1946년 개항장으로 인천과 부산, 군산, 목포, 묵호 등 5개항을 지정했다. 하역업은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자유기업이었고 주로 노무를 공급하는 일에 국한됐다.

전반적으로 국내 항만의 하역업이 원조물자나 연안수송물자를 제외하고는 취급물자가 없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을때 인천항은 미군 진주와 함께 뒤따라온 군수물자 운송으로 활기차게 돌아갔다. 당시 부두노무자에게 주어지는 노임만 월 1억원에 달했다.

해방을 맞이한 부두근로자들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통솔자 없이 자유행동을 하다 보니 일거리를 얻는데 애로가 많았고 화주 역시 교섭 대상이 없어 곤란을 겪는 현상이 발생했다.

1945년 10월25일 부두노동자들은 이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인천자유노조를 창설해 부두 노무자들을 결속하게 됐다. 자유노조는 각 부두를 돌며 근로자들에게 가입을 유도했고 6천여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자유노조는 이후 작업장 문제로 조선운수 소속 근로자들과 분쟁이 발생했고 정부의 중재에 의해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선운수 소속 근로자들은 염작업장과 우마차부 등이 뭉쳐 1948년4월10일 인천부두노동조합을 설립하면서 부두 노무자들은 또 다시 분파하고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부두노무자들의 대립각은 1949년3월 두 노조가 통합해 대한노총 항만지구위원회로 출범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항만지구위원회는 십장제도가 조직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노동조합 자체의 통일적인 단체교섭이나 협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노조규약은 십장별로 다스려지는 작업체계를 그대로 성문화한 십장중심의 규약이 채택됐고 십장이 당연직 대의원이 었고 도십장이 분회위원장이 됐다.

부두근로자들은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조직기반을 구축해 갔으나 6·25를 맞아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항은 급작스럽게 군수물자들이 밀어닥쳤다.

종전 3~4천여명이 연안 화물수송에 종사하던 부두노동자들은 군수화물이 급증하면서 1만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당시 부두근로자들은 황평지방에서 남하한 피난민이 대부분이었다.

1951년 1월4일 작전상 일시 후퇴했다가 2월10일 국군 해병대가 인천을 탈환하면서 그 뒤를 이어 각지로 피난을 떠났던 노조간부들이 복귀하면서 분산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재정비됐다.

인천부두노조는 분산된 조직을 정비하고나서 조합비를 징수하면서 재정적 안정을 갖게됐고 이를 바탕으로 조합원을 위한 양곡배급을 행정당국에 요청에 관철시켰다.

인천부두노조는 1952년 4월 부두노조후원회를 결성해 조합원 1인당 9천환의 회비를 기금으로 식량배급기금으로 활용하고 각 분회에 노임조건으로 대출하는 등 후생활동을 전개했다.

◆부두노조의 시련기

부두노조는 근로순보(勤勞旬報)를 창간해 조합원들의 계몽과 홍보활동을 전개하는 등 활동을 펼쳤으나 조합원을 위한 근로조건의 개선이나 적정임금의 보장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항상 십장 중심의 이익을 위한 제한된 조합 운영을 하면서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게된다.

조합 운영에 조합원의 참여를 기피한 조합 운영은 경리 부정과 식량배급 부정 의혹을 받아 결국 1952년12월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게 되고 이는 후에 신파와 구파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노조간의 분쟁은 당시 군 수송작업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해 관계기관의 중재로 신구파 대표 각 6명씩 대표를 선출해 대의원대회를 선출해 임원을 재선출하면서 일단 수습국면을 맞는 듯 했으나 이어 노동관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법에 의해 새출발해야 하는 시련을 맞게 된다.

1953년 정부는 법에 의한 노동조합이 아니고서는 쟁의조정이나 부당노동행위의 구제 등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하는 노동조합법과 시행령을 공포했다.

노동조합법 공포에 따라 인천부두노조도 새출발을 해야 했으나 조합원 일부가 현 노조 간부들은 법이 정한 근로자가 아닐 뿐아니라 지난 날에 부조리가 많았다며 간부배척 운동이 전개되는 일이 발생했다.

부두노조간 분쟁이 계속되자 정부는 중재에 나섰고 노조에 대한 실태조사를 반장과 십장제도를 폐지하도록 요구했다. 인천부두노조는 이에 따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새출발을 시도했으나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조합활동은 구심점을 잃고 파벌 중심의 소집단으로 분열의 길을 걷게됐다.

대의원대회가 끝난지 2일만에 조선운수 사업장에서 인천조운노동조합 결성을 시작으로 50개 단위노조가 설립됐다. 이후 3년여간 부두노조는 분열과 반목의 시련기를 맞았다.

단위노조는 자체적으로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56년 3월25일 시청 의사당에서 단위노조 해산결의를 하고 통합노조인 인천자유노조를 출범시켰다. 인천자유노조 출범에 이어 같은해 8월 미군화 하청회사 소속 노조원들이 인천부두자유노조를 결성하면서 다시 대립기를 맞았으나 이듬해 부두자유노조위원장이 사퇴하면서 양노조는 다시 통합했다.

1960년 4·19의거 이후 노조는 자유당의 비호를 받아 집권을 유지해 온 노조간부들에 대한 정화운동을 전개해 내분을 맞았으나 간부들이 일괄 사퇴하면서 사태는 수습됐다.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이후 국가재건사업이 펼쳐지면서 부두근로자들은 같은해 9월20일 전국부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인천항에도 인천지부를 출범시켰다.

부두노조 인천지부 조합원은 항만 일원에서 하역 및 그 부대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로 하고 조합원의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동일한 발언권과 결의권, 선거권, 피서거권을 비롯 조합비 납부의무도 갖게 됐다. 1961년 12월15일 3천여명의 조합원이 등록했고 이듬해 3월30일 등록증이 교부됐다. 반장제도가 폐지되고 경력과 신망이 두터운 조합원을 연락원으로 위촉했다.

◆하역협회 창립과 단체협약

부두근로자들은 1962년8월22일 인천하역협회가 창립돼면서 단체교섭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았다. 그동안의 교섭방식은 부두근로자와 특정기업이나 사업장별로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하역회사별로 임금이 달라 조합원들의 불평과 불만이 됐다.

부두노조 인천지부는 인천하역협회 창립과 함께 임금통일화 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 1월30일 노사대표자들은 통일된 임금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산별조합으로 조직을 정비한 인천지부는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적용하는데 성공했다.노사는 이어 1963년3월19일 단체협약을 체결함으로서 인천항의 하역작업에 대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됐다.

1965년 인천지부는 연락원들의 ‘9할재비 부정사건’이 터지면서 또 다시 시련을 맞았다. 항만 화물은 파동성이 심해 물량이 폭주할때와 작업이 전혀 없을 때가 많아 조합원들의 작업이 유동적이었다.

분회에 속해 있는 연락원은 물량이 폭주하면 작업인원을 끌어모으느라 과거 반장과 동일한 행세를 했다. 조합 간부들은 전임제도를 수립하지 못한 채 연락원을 겸직하면서 두몫 세몫의 임금을 취득한데서 조합원들의 불평 불만이 쌓여 탄원서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1966년 9월3일 수습대회를 갖고 새로운 집행부가 출범했으나 2년여만에 지부장이 연락원을 겸임하면서 임금을 중간 취득하는 비리사건이 다시 터져 사퇴했고 집행부 공백사태가 발생했다.

직접 수습에 나선 본조는 군소분회를 부두 지역별로 병합 재편성하고 사용주의 노임직불제를 촉구해 9할재비란 모순된 부당행위를 근절하고 집행부 임원의 연락원 겸임을 금지하는 등의 수습방안을 결정했다. 이 방안에 따라 35개 기업별 분회가 해체되고 하역 14개 분회와 7개 자치분회가 6개분회, 3개 자치분회로 개편됐다.

◆항만기계화

1966년과 1967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 마그넷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힘과 존속을 위협했다. 특히 근육노동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노조는 기술노동으로 변화하게 됐다.

하역노동의 기계화되면서 일반하역분야의 조합원이 1969년 2천196명, 105개 작업반에서 1970년 1천727명 99개 작업반으로 감소했다. 인천지부는 이같은 변화에 대응하기위해 ‘근로자에 대한 대책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게됐다.

1970년 대한통운과 한진상사가 미국의 컨테이너 전용선사인 ’멧슨’과 ‘씨랜드’와 각각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인천항에 컨테이너를 등장시켰다. 노조는 컨테이너의 출현은 조합원을 대량 실직케하는 중대문제로 보고 같은해 2월23일 긴급중앙위원회를 개최, 기계화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함께 대한통운과 한진상사에 대해 ‘대책없는 컨테이너 도입’을 결사반대하기로 결의했다.

1971년 인천항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특히 미군이 지난 1951년4월부터 전용하던 인천내항 제1도크를 20여년 만인 1972년5월1일 한국정부에 이양하기로 결정되자 이 곳에 종사하던 군항분회 노동자들의 구제를 위해서도 조합의 조직개편은 불가피했다.

노조는 1971년 11월25일 직능별, 기능별로 지역별로 조직을 개편하고 조합원들에 대해 취업기회의 균등과 임금의 평준화 항만변동에 따른 대비를 목적으로 하고 기존질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해상 2개분회 육상 6개 분회로 편성했다.

백범진기자 bjpaik@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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