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개항 이전까지 해외무역 활동이 매우 미비했고 외국에서 선박을 통해 화물이 오가는 예도 거의 없었다. 1883년 개항이 되자 외국으로부터 수출입 화물이 인천항을 통해 드나들기 시작했고 당시 해상운송은 일본인 회사들이 전담했다.

◆개항 광복이전

개항 당시는 항만운송에 있어서 전문적인 영업이 존재하지 않아 외국상회나 이들과 거래하는 한국 상인들의 요청에 의해 그때마다 작업을 벌였다. 이때부터 부두노동자들은 하역 실적에 따라 임금을 받는 일당제 체제를 가졌고 이 체제는 1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항운노조 상용화의 핵심 골자는 일당직 부두노동자들을 하역회사에 소속시켜 임금을 월급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개항이후 인천과, 부산, 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임금 노동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해 1910년 전국적으로 1만 명에 달했다.




(▲1900년대초 제물포항 건어물 하치장에서 항만노무자들이 배로 운반된 건어물을 지게로 나르고 있다. 인천신문자료사진)

인천항 개항이후 모여든 부두노동자들은 소농민과 어민, 일본 기선 진출로 실업자가된 조군(漕軍)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초기 일시적이거나 계절적으로 노동에 종사하다가 화물량이 늘어 상시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전적으로 부두노동자로 전환됐다.

부두노동자가 된 이들은 자기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생활했다. 개항 초기 부두노동자는 외국상회나 화물의 소유자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로 시작됐으나 이후 항만하역의 경제적 영향이 커지면서 종합적인 관리체제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모군청(募軍廳 )이라고 칭하는 하역조합이 만들어져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모군청은 정부로부터 노무자 감독권을 허가받아 설립됐으며 노무자를 합숙시켜 노동력을 확보하고 수요에 따라 하역노동력을 공급했다.

부두노무자는 모군청을 통해서만 항만작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부두노동자는 항만하역에 대한 노무독점 공급권을 갖게 됐다. 모군청은 부두노무자의 질서를 유지하고 유경험자를 우선 취업시켰다. 모군청은 화물 취급상의 신용보증의 이유와 항운 수요자들이 노무자에게 모두 일임할 수 없다는 요청에 의해 정부로부터 관리를 받았다.

이때부터 하역작업은 하역이 벌어지는 현장을 중심으로 선내작업, 부선작업, 접안작업, 창고작업으로 구분해 전속노무자에 의해 작업이 이뤄졌다.

선내작업과 본선작업은 본선의 선측까지 운반되어 온 화물을 선창에 옮겨 적재하거나 선창에서 안벽이나 부선에 화물을 옮겨 싣는 작업이다. 부선작업은 해상에 머물고 있는 선박이나 접안 본선의 선측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작업이다.

부선작업은 조석간만의 심한 인천항의 특성상 큰 선박이 부두까지 직접 접안하지 못하고 외항에 닻을 내리면 작은 부선들이 가서 화물을 옮겨 싣고 내항까지 들어오는 체제이다. 부선작업은 1974년 인천항 갑문이 개항하기까지 계속됐다.

이로 인해 인천항 작업시간은 전통적인 기준인 일출에서 일몰까지에서 만 조 시부터 다음 만조시까지 기준이 또 붙게 됐다. 만조시부터 다음 만조시까지 시간은 12시간이고 만조시각은 하루에 50분씩 늦춰지므로 부두노동자의 작업시간은 12시간이고 작업시작과 종료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매우 불규칙했다.

인천항은 개항이후 10년간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다가 청일전쟁이 끝난 뒤 무역량이 급증하면서 1906년 항만축조를 시작했다. 1906년부터 6년 사업으로 총공사비 88만여원을 들여 인천역을 우회하는 일대에 부두시설 공사를 벌여 1911년 3월 완료했다.

그러나 인천항은 이 공사로 부두로서 약간의 모습을 갖췄으나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증가하는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일본총독부는 1911년6월11일 조수간만의 영향을 안 받는 갑문항인 인공축항 건설에 나서 1918년 부두길이 454.55m, 해수면적 3만평,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준공했다.

이에 앞서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1910년 가을 부두노무자를 관리하던 모군청이 폐지되고 이후 부두노동자들은 자기 기능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연관계에 따라 영신조(永信組,) 창신조(昌信組), 인신조(人信組) 등의 노동단체를 결성해 부두노무자의 세력이 분리됐다.

영신조는 외항선 하역에 종사하던 노무자들로, 창신조는 국내 연안선, 인신조는 철도역 창고 등에서 미곡운반에 종사하던 노무자들로 각각 구성됐다. 이들 단체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기위해 합숙소를 설치하고 독신자에게는 숙식의 편의를 제공했다. 가정을 가진 노동자도 합숙소에 항상 대기하도록 했다.

항만노동은 현재와 같이 개별노동이 아니라 20명 내외의 집단적 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업조의 구성이 불가피했고 이를 인솔하는 조장(助長)과 십장(什長)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이들 단체에 속한 항만노동자들은 십장이 지정하는 장소와 시간에 취업했다. 십장은 부두 인근에 모여든 임시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부두노무자들 선발해 취업시키며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하역작업은 연안하역의 경우 어깨메기, 목도, 갈쿠리잡이가 대표적인 직종이고 노동은 옥외에서 기상조건에 상관없이 중량의 화물을 어깨에 메고 부선에서 안벽에 걸친 발판을 타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형태로 작업했다. 화물을 운반할 때마다 만보라는 표쪽을 1개씩 주는데 이 개수에 따라 임금이 계산됐다.

일제하에서 주요 하역하던 화물은 일제의 수탈물자인 곡물 등 주요 농산물과 광산물이었다. 화물 중량은 대개 1t 미만이었다. 1930년대 이후로는 중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수물자의 조작이 주를 이뤘고 하역 노동은 완전 인력에 의한 어깨메기나 목도작업이 주였고 하역장비는 전무한 상태였다. 부두 노동자들은 중량화물을 맨몸에 의지해 실어 날라야 했다.

◆부두노동자의 노동쟁의

인천은 개항장으로 일찍부터 노동자가 많이 몰려들어 부두노동자가 많았다. 특히 인천은 미곡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항만이었기 때문에 벼를 현미로 만드는 매가리업과 현미를 백미로 만드는 정미소가 부둣가에 많았다. 당시 정미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3~4천명에 이르렀다.

부두노동자들은 1920년대 들어 국내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쟁의를 벌이기 시작했다. 쟁의의 원인은 임금인상과 임금 인하에 대한 반대였으나 대우 개선이나 정치적 요구도 포함됐다.

1926년 11월9일 창신조 노동자 150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부두하역의 불규칙성으로 한 달에 15~16일 밖에 일을 하지 못했다. 이들 노동자들은 곡물 하역료 매석당 6전에서 1전씩 인상해줄 것으로 물산객주조합에 요구했으나 받여들여지지 않자 동맹파업을 벌였다. 이후 객주조합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쟁의는 해결됐다.

1938면 영신조의 내선조(內船組)노동자 800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요구는 1930년대를 전후해 한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승되지 않고 하락했고 1931년 만주사변이후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해마다 오르는 것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일제가 경찰을 동원해 쟁의주동자들을 구속하고 탄압을 가하면서 쟁의는 무산됐다. 일제하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은 단순한 임금인상의 요구라기보다 일본인에 대한 반일감정에서 출발한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범진기자 bjpaik@i-today.co.kr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