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47개 섬중 38개 뭍으로 변해


공촌천이 지나는 ‘쑥데이 고개’(경서동), 호두산(虎頭山) 앞 난지도(蘭芝島)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난지초가 자생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난지도’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난지초를 캐기 시작했다.



(▲월미산에서 촬영한 인천의 옛 시가지.)

어떤 이들은 약초를 뿌리째 캐다가 재배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난지도의 난지초는 멸종됐고, 그 생김새를 아는 사람조차 없게 됐다. 난지도 또한 국제컨트리클럽이 들어서는 바람에 육지로 변해 사라지게 됐다.

이처럼 인천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은 매립과 그 운명을 같이 했다. 120여 년 전 개항(1883년)당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은 하늘의 별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많았다. 중·동·남·서·남동·연수구 뭍 가까이에는 모두 47개의 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땅이 가장 넓었던 서구 앞바다에는 가장 많은 33개의 섬 무리들이 있었다. 이 밖에 중구 4개, 연수구 3개, 동구와 남구, 남동구가 각각 2개씩 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섬중 현재 남아 있는 섬은 9개에 불과하다. 동구의 작약도(芍藥島)와 서구의 세어도(細於島) 등이 온전한 섬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38개는 섬으로서 그 운영을 다했다. 26개 섬이 흔적만 남긴 채 육지로 변했고, 12개 섬은 형태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졌다.

개항 이후 섬 매립의 시초는 인천항 축조공사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동양 유일의 갑문식 선거(제1도크)를 만들기 위해 해안 8만5천380여 평을 메우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 때 중구 항동의 분도(糞島)는 매립에 쓰일 돌과 흙을 채취하는 바람에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인천여상 앞 바다에 있던 사도(沙島)도 육지로 변했다. 그 뒤 분도와 사도는 1966년에 시작해 1974년 완공한 제2도크 공사로 지도상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5만t급 선박이 직접 입항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춘 제2도크 축조공사로 해안 42만6천여 평을 매립하면서 남구 앞바다의 섬들도 수난을 겪었다.




(▲1910년대 인천앞바다 전경이다. 사진 오른쪽 섬이 분도이고 바다 멀리 보이는 작은섬이 사도(사진 왼쪽)이다.)

용현동 토지금고 남측 1천800여 평의 원도(猿島·일명 락도)가 종적도 없이 사라졌고, 경인고속도로 입구와 지금의 제2경인고속도로 종점의 ‘인스파 월드’ 앞 도로 사이의 150여 평의 소원도(小猿島)도 자취를 감췄다.

이와 함께 제2도크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인 1974년까지 섬으로 남아 있던 중구의 월미도와 소월미도는 완전히 육지와 연결돼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1960년대까지 만해도 ‘괭이부리’로 불린 묘도(猫島·지금의 인천시 동구 동일방직 북측 삼미사 주변지역)는 1910년대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뭍으로 변했다.

유원지와 관광지로 조성한 연수구 송도 앞바다와 공단조성을 위한 남동구 고잔·논현동 앞바다 등의 매립으로 여러 섬들이 생명을 다했다.

연수구 옥련동 아암도(兒岩島·1천800여 평)와 소아암도(所兒岩島· 60여 평)는 1980년과 1981년 잇따라 벌어진 인천위생공사와 (주)한독의 48만2천여 평에 달하는 해안매립공사에 따른 ‘송도해안도로’공사로 내륙화 했다.

토지공사가 1985년 남동공단 조성을 위해 85만여 평을 매립하는 과정에서 대원예도(大遠禮島)와 소원예도(小遠禮島)를 메웠다. 대원예도는 80년대 초까지 극동방송 송신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남동구 고잔동 남동공단안에 근린공원으로 변했다.

인천 앞바다 섬들을 가장 많이 삼켜 버린 매립은 역시 동아건설의 김포매립지이다. 980년 1월 농림수산부로부터 매립면허를 받은 동아건설은 율도(栗島)∼청라도(靑蘿島)∼일도(一島)∼장도(獐島)∼거첨도∼안암도(安岩島)∼가서도(駕嶼島) 등 7개 섬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간척사업을 벌였다. 이 바람에 일도와 율도는 1977년과 78년 복합화력발전소와 한화발전소 터로 뭍이 됐다.

제방으로 물길이 막히면서 바닷물이 들고 나던 서구 원창·경서·연희동 등지 1천126만6천 평 안에 있던 이도(耳島)와 문점도, 소문점도, 장금도(長金島), 소도(小島), 사도(蛇島), 자치도 등 8개 섬도 농경지 조성을 위해 급기야 땅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수도권매립지도 섬을 없애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환경부는 1988년 전체 매립면적의 55.7%인 627만 평을 동아건설로부터 넘겨받아 쓰레기 매립지를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거첨도와 매도(梅島)와 안암도, 육도(陸島), 명도(明島), 축도(丑島), 승도(升島), 토도(兎島), 길무도(吉舞島), 난지도(蘭芝島) 등이 육지로 변했다.

김포매립지와 수도권매립지 조성사업과 관계없이 사라진 섬도 있었다. 서구 가좌동의 소감도(小監島·3천여 평)은 동화개발 등이 1975년 원목하치장 조성사업으로 해안 36만여 평을 매립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목재단지로 쓰이고 있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궁궐용 목재지정 '벌목금지' 지정 구역도


공촌천 주변의 산림


1950~60년대 초 만해도 공촌천 주변 사람들은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활비를 보탰다. 경서동이나 공촌동, 연희동 등 공촌천 일대는 바다와 접하는 ‘곶’이 대부분이라 그리 너른 무논들도 많지 않았다. 이들 주변 사람들은 참나무와 소나무 등 땔감 나무를 해다가 징맹이 고개를 넘어 계양이나 부평에 가서 팔았다.

“부평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봤는데, 이곳 사람들이 주 거래처로 삼은 곳이 아마 부평 백마장 일대 양색시촌이었지. 그 곳에서는 부평시장보다 좀 더 후하게 나무 값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인천시 서구의회 민태원(55)의원이 말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조선조 영조 때였다. 옛 고잔리 지금의 경서동에 소나무를 키우고 벌목을 금지하는 ‘양송금벌(養松禁伐)구역이 있었다. 수도권매립지 조성으로 지금은 흔적이 없는 포지곶이라고 부르는 해안과 뱀섬, 두 곳이었는데 품질좋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해 궁궐건축 목재로 지목돼 벌목이 금지됐다.

영조 17년(1741년)에는 조정에서 새 궁궐을 지으려고 이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벌목인력으로 부평사람 수백 명을 부역으로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부평부는 서구와 부평구, 서울 오류동까지 드넓었다. 백성들이 수십 리 밖에서 부역을 나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배에 싣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조선조 연산군도 서곶 경서동 해변에 민간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구(禁區)를 만들어 농민들을 내몰았다. 경관이 좋은 넓은 구역을 지목해 자신의 놀이터로 주민들을 나가게 했던 것이다. 서러움을 받던 농민들이 항의하자 연산군은 경기감사를 시켜 진압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 처럼 기록을 보더라도 경서동을 중심으로 공촌천 주변지역은 꽤 괜찮은 나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땔감 벌목은 이들 농민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을 것이다.

“부평이나 계양 사람들이 나뭇지게를 지고 넘어가는 경서동이나 공촌동 사람들에게 텃새를 많이 부렸어. 어떤 이들은 나뭇짐을 지고 가다가 계양이나 부평 사람들에게 지게 채 빼앗겨 빈 몸으로 되돌아오곤 했거든.”민 의원은 설움을 당한 서곶 사람들이 계양과 부평 사람들을 상대로 곧장 반격에 나섰다고 전한다.

“부평이나 계양 사람들이 맛이나 게를 잡아 가기 위해 경서동 갯벌에 오거든, 서해 갯벌이야 민물과 썰물이 시간 맞춰 들락거리다보니 계양이나 부평 사람들이 갯일을 하고 되돌아 가는 시간은 뻔하거든, 그러면 서곶 사람들이 징맹이 고개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부평사람들이 잡은 게와 맛을 몽땅 빼앗는거야.” 부평과 서곶 사람들이 분풀이로 혹은 재미삼아 뺏고 빼앗기는 일이 되풀이 되면서 동네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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