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가끔, 우리 곁에서 사라져 영영 볼 수 없는 것들,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저려 옴을 느낀다. 세월의 변화, 그 변전을 누가 막으랴. 소금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그런 감회에 젖는다.

인천 사람들의 성정을 꼬집는 ‘인천 짠물’ 운운하는 듣기에 다소 곱지 않은 별칭도 기실 소금에서 연유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는 사람들의 지레 연상이었지 실제 인천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라고 할 것이다. 인천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개화되고 가장 먼저 개명한 곳인데, 그래서 가장 세련되고 품위 있는 저명 인사가 많았던 곳인데 짠물이라니. 물론 개항과 광복, 6·25 사변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을 때마다 한꺼번에 인천 땅에 밀어닥친 외지 유입 인구에 의해 각박해지는 생활 여건과 인심을 빗대, 그것을 마침 이곳 특산물 소금물로 상징화 하였지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인심이 사나웠던 곳이 꼭 인천뿐이었을까.

짜다는 이야기가 굳이 거슬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 곧 당구 실력이다. 당구에 대해서는 아주 문외한이지만 듣기로는 인천 사람들의 당구 실력이 전국에서 가장 짜다는 것이다. 같은 점수의 두 사람이 시합을 해도 월등한 인천 사람의 실력 앞에 다른 지방 사람이 맥을 못 춘다는 이야기다.

인천 사람들의 실력이 이렇게 높은 까닭은, 시합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에도 인천에서는 벌칙이 엄격해 실수에 따라 벌었던 점수를 얼마든지 까먹는데 비해 여타 지역은 그런 벌칙이 없어 다소 느슨하다는 것이다. 인천 사람들이 이렇게 훈련되었으니 그 실력이 월등할 것은 뻔한데 이 정당한 실력을 마치 점수를 속여서 그런 것인 양 ‘짜다’고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소금에 관련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 보자. 학생 시절 모자에 달던 모표(帽標)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고안해 냈는지 우리가 달던 모표는 가느다란 선으로 된 소금 결정(結晶) 세 개 위에 높을 고(高) 자를 흰색 등대 모양으로 형상화 한 것이었는데, 그 모표가 표상하는 의미는 ‘양심은 민족의 소금, 학식은 사회의 등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뜻이 너무 근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고상한 의미의 모표를 달았던 학교 역시 전국에서 인천의 이 학교가 유일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처럼 고귀한 소금이 인천의 대명사가 되게 한 한 원인(遠因)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주안이 191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그리고 남동과 소래가 192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금을 생산했다. 이 세월 동안 인천에서 나는 굵은소금, 고운소금이 전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방대했던 염전 지대는 주택과 공장 지대로 변모하여 다시는 ‘인천 소금’ 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는 창상지변(滄桑之變)의 감을 느끼나, 어린 시절 여름이면 광 속 소금 가마에서 땀 흘리듯 거무스름한 간수가 흘러내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김윤식 시인 인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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