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한때 인심이 각박하다는 뜻도 담긴 짜다는 별명을 듣고 있던 만큼 소금으로도 유명했다. 1910년 후반부터 60년대에 이르는 약 반세기동안 인천은 김장소금, 간장소금, 고운소금 등 모든 소금의 산지로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인천의 특산명물하면 언제나 소금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이제는 사정이 많이 변했다. 지금은 인천에서 한줌의 소금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천은 근대식 천일염 기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염전을 축조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상은 신태범 박사의 ‘먹는재미 사는재미’에서 본 인천소금 이야기다.

인천을 유명하게 한 소금은, 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어느새 인천사람에게 ‘짠물’이라는 별명을 하나 주었다.

▲별명 ‘짠물’ 바라보기

인천 정체성 조사 일환으로 인천사람이 짠물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시민 의식을 알아본 설문조사 결과과 최근 나왔다. 민예총 인천문화정책연구소가 지난 2001년 인천시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대한 뒤늦은 결과다.

우선 ‘짠물이라는 별명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0%가 ‘그렇다’고 답했다. ‘누가 부르는가’를 묻자 대부분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한 외지인’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가하나”에 대해 ‘바닷가에 살아서’ ‘과거 염전이 있는 장소라서’로 답을 한 사람이 절반을 차지했다. 나머지 절반은 ‘금전적으로 인색하다. 계산을 너무 앞세워서’라고 답했다.이는 인천사람 스스로 별명에 대해 긍적보단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설문조사를 수행한 김창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연구위원의 분석은 이렇다.

소금은 인천사람의 성품을 말하는데 중요한 코드라는 데서 출발한다. 또 별명이란 남의 장점을, 갖지못한 측이 비아냥거리는 의도로 붙이는 것이라는 전제를 깐다.

개항지로서 근대에 먼저 진입한 도시에 대해 공통적으로 농촌사람들은 도시인들을 깍쟁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는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먼저 체화한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천사람들이 근대를 먼저 겪음에 따라 개인주의적인 습성을 빨리 체득했으며 이는 미리 깬 도시사람이라는 성품을 만들어 냈다고 푼다.

따라서 김 위원은 “짠물이라는 별명을 근대성에서 연유된 합리성으로 인식, 잘 살리는 쪽으로 가자”며 “나아가 더 불러달라고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최초 천일염시대를 열다

인천을 유명하게 한 소금은 ‘주안염전’에서 비롯된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주안에 실험용 천일염전이 축조됨으로써 천일염시대를 열었다.

바닷물로부터 염도가 높은 짠물을 만들고 이를 다시 끊이는 자염제법(煮鹽製法)을 오랫동안 고수해왔으나 개항과 함께 청국의 천일염이 쇄도하면서 일제에 의해 천일제염이 도입된다. 이런 생산변화가 가장 먼저, 크게 진행된 곳이 인천이다.

19세기말 대한제국은 인천에 농상공부가 관할하는 제염시험장을 설치했다. 개항과 함께 값싼 수입염이 물밀듯 밀려오는 데 따른 조치였다.

‘제국신문’ 1900년 11월29일자에는 인천제염장에서 농상공부 기수 변국선이 소금 일백석을 제조해 방매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즉 이 해부터 인천제염장에서 자염을 생산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염식 제염장은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수입염은 가격이 낮고 순도가 높아 경쟁력면에서 국산소금보다 월등했기 대문이다.

일제는 러·일전쟁이후 막대한 재원이 소모됨에 따라 재정확보를 위해 소금에 대한 전매품 독점을 시도한다. 조선에서 고문정치를 실시하면서 재원조사에 나서 전국 염업상황을 파악한다. 자염은 생산비가 많이 들어 청국 수입염과 경쟁할 수 없는데다 소규모 단위 생산체계로 전국에 분산돼 통제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러른다.

한편으로는 자국내 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천일염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본국에서는 지형과 기후상 천일염전의 축조가 어려웠으므로 근접거리 식민지 조선에 대규모 천일염전을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천일염업의 시험장으로 일제는 인천을 주목했다.

주안은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경성이라는 거대한 인구를 배후에 두고 있으며 경인철도로 신속한 수송이 가능,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천일염을 손쉽게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험결과 주안의 천일염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3차에 걸쳐 천일염전을 확대해 간다. 1기(1908~1914년)에는 주안에 99정보, 2기(1918~1920년) 주안에 139정보, 3기(1920~1924년)엔 남촌(남동) 300정보, 군자에 575정보가 설치됐다. 주안, 남동, 군자지역 염전이 총 1천113정보에 이르게 된다. 이결과 이지역 소금 생산량이 국내 총수요량의 50%가 넘는 15만여t으로 늘어났다. 이후 1930년대 중반엔 소래등지에 천일염전(549정보)이 확장된다.

결론적으로 천일염전 주안염전의 축조와 확대는 근대를 맞이하는 인천의 위치와 중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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