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아파트와 공장이 빼곡히 들어섰지만 부평 뜰은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알아주는 곡창지대였다. 부평에서 부천을 거쳐 서울 영등포까지 펼쳐진 너른 들판이 바로 부평평야였다.

1899년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 부평 뜰은 농토라기보다는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다. 흡사 물이 빠진 서해 갯벌의 모습이었다. 부평역에서 바라 본 부평 뜰은 까마득했고, 갈대밭 사이 논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이 뜰 한복판을 꿰뚫고 흘렀던 굴포천에는 밀·썰물에 바닷물이 한강을 타고 들락거렸다.

부평 뜰의 농토 만들기는 5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우희열’이라는 사람이 부평 뜰을 개척하겠다고 왕에게 글을 올렸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1동 주변의 복개이전 굴포천 모습.)

태종은 부평부사였던 ‘목진공’에게 농민들의 의견을 물어 추진토록 했으나, 농민들은 자칫 자신들의 논에 피해가 닥칠 것을 염려해 반대했다.

태종은 중신회의를 열어 ‘자기 돈으로 개척 하겠다’는 우희열의 뜻을 꺾을 명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부평 뜰의 개척을 허락했다. 우희열은 기존 농민들의 논을 건드리지 않고 종전 400결의 농토를 1천결로 넓혔다. 당시 1결은 수확량에 따라 2천753평에서 1만1천36평까지 6등급으로 나눴다.

그러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5천 정보(1정보는 3천평)의 대평야는 7~8월 장마철이면 한강 물이 넘쳐 하루아침에 물바다로 변했다. 비옥한 토지, 경인철도와 한강 등 뛰어난 운송수단, 서울과 인천사이의 천혜의 입지조건 등을 두루 갖췄던 부평평야는 매년 침수의 되풀이로 예전의 풀이 무성한 갯벌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부평 뜰은 일제 강점기에 비로소 농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인 지주들은 총독부를 등에 업고 농지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의 바람을 타고 부평수리조합 설치인가를 받았다.

당시 저수지나 보 등 수리시설에서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몽리(蒙利)구역이 부천군 부내· 계남·오정·계양면과 김포군 고촌·양서면 등으로, 그 면적이 3천600정보에 달했다.

이들 일본인 지주는 신곡리에 물을 빼고 댈 수 있는 양배수 기관실과 한강 범람에 대비해 둑을 올려 쌓았다. 착공 2년 만인 1925년 봄 완공으로 농사와 농지개간에 활기를 띠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 해 여름 ‘을축년대홍수’라 일컫는 재앙이 찾아왔다. 중부지방 대호우로 한강이 범람해 둑이 무너졌다. 부평 뜰 전체가 온통 물에 잠겨 지대가 낮은 고니새말(신복동)과 영성미(삼산동 신촌)의 오두막집이 물에 떠내려가고, 일주일이상 계속된 흙탕물에 농작물이 쓸려 나갔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조차 없던 농민들은 홍두평(김포· 황해사농장· 한강방수제)둑막이 공사에 잡부로 나가야만 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인 삼산농수 주변의 부평 뜰.)

이후 부평수리조합은 한강변 둑의 높이를 종전보다 10배 이상 올려 쌓는 등 수해대책을 세운 일본인들과 약삭빠른 한국인 지주는 농민들이 수해로 실의에 빠진 틈을 타 본격적으로 농지사냥에 나섰다.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부호들을 중심으로 대농장이 생겼다. 이중 ‘반전농장’ 주인이었던 친일파 송병준이 중리 땅을 사들였고, ‘수진농장’도 내리 땅을 매입해 반전·수진·교전 등 대농장들이 등장했다. 당시 부평지역에만 일본인 지주가 3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수리조합은 물이 닿지 않는 고지대의 황무지를 싼 값에 사들여 2, 3단씩 물을 끌어 들여 농토를 만들었다. 1943년 부평수리조합은 ‘한강수리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1952년에는 오정지구 232정보를 확장해 몽리지역을 4천800 정보로 넓혔다.

이어 양촌·화성·대곶·검단·대능리 등 김포지역 간척지까지 손을 대 몽리지역이 7천800 정보에 이르렀다. 한강수리조합은 1970년 사옥을 김포읍 사우리로 옮기고 이름도 ‘한강농지개량조합’으로 고쳤다.

회색빛 콘크리트에 뒤덮여 옛모습조차 추억할 수 없어


도시개발에 외면당한 굴포천 지류


청천천은 천마산과 중구봉 사이 효성동 ‘도둑굴’이라는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가는 개울이다. 아나지 고개 오른쪽을 끼고 원적산 암벽을 들이 받은 뒤 청천동(마제이) 앞 마장 뜰로 가로 질러 동류하다가 삼산동 벌판에서 원통천과 합류한다.

이 냇물은 모래가 많이 쌓여 평지와 다름없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 이름을 ‘청천’(淸川)이라 지었다. 1923년 설치된 부평수리조합은 물줄기 개선을 하면서 부평관광호텔 쪽으로 곧게 뚫어 수리조합 서부간선수로에 연결했다.

이후 1965년쯤 새로 뚫린 청천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한국수출 4공단이, 남쪽은 대우자동차 공장이 들어섰다. 청천천은 모두 복개됐고, 그 위로 아스팔트 신작로가 나 있다.

계산천은 계양산과 중구봉 사이 계산풀장 골짜기에서 원출해 계산동 중심가를 꿰뚫는다. 먼동재(望東山) 기슭을 스치고 고성산(古城山) 냇물을 받아 계산동 ‘살나리’(서부간선 다리 건너편 마을)로 흘러 직포인 한다리개(大橋川)로 합류한다.

여름철 장마가 들면 계산천은 밀어 닥치는 급류에 휘말려 하천은 삽시간에 범람했다. 큰물에 휩쓸린 주춧돌 같은 큰 돌이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고, 개울둑은 매년 터져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산한 촌에 불과했던 계산동이 계산지구 도시개발로 몰라보게 변했고, 계산천도 상류지역이 모두 콘크리트로 덮어져 옛 모습을 찾아 볼 길이 없다.

고려때 국영매방이 있던 곳 송도로 통하는 부평의 관문


징맹이 고개


계양구 계산동에서 서구 공촌동으로 넘어가다보면 계양산 주봉 서쪽에 기다란 고개가 나타난다. 길이가 8km에 달해 인천서 가장 크고 높은 ‘징맹이 고개’(景明峴)다. 앞으로 생태다리가 놓일 곳이다.

징맹이 고개는 고려 충렬왕 때 부평 뜰과 관련 있다. 부평 뜰은 잡초가 우거진 사냥터였다. 원나라 황제의 딸 ‘제국공주’와 정략혼인한 충렬왕은 매 사냥을 즐겨 부평 고을에 다섯 번이나 행차했다.

당시 수도였던 송도의 국영 매방(鷹房)을 징맹이 고개로 옮길 정도였다. 충렬왕은 계양도호부를 93년 만에 폐하고, ‘참으로 길(吉)한 고을’이라는 이름의 ‘길주’(吉州)라는 이름으로 고쳐 목사 고을로 한 등급 승격시키기도 했다.

사냥하는 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키운 매였다. ‘해동청 보라매’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매의 사냥 실력은 원나라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원나라는 우리나라 매방에서 징발한 매를 으뜸으로 쳤다. ‘매를 징발 한다’고 해서 ‘징매(徵鷹)고개’라고 한 것이 징맹이 고개로 변했다.

징맹이 고개는 옛날 유명했던 발아장(發阿場·지금의 검암동 바름이 마을)에서 큰 여관이 있었던 가현산의 광인원(廣因院)과 통진의 조강(祖江)나루터와 풍덕(豊德)을 거쳐 송도로 가던 길목이었다.

계양산 기슭인 징맹이 고개는 악명 높은 도둑들의 소굴로 이름 나 있었다. 한때 조선시대의 의적 ‘임꺽정’도 계양산을 무대로 활약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징맹이 고개의 도둑들은 사납고 무서워 전국적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징맹이 고개를 흔히 ‘100명 고개’로 불렀다. 고개를 넘자면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야 했는데 적어도 길손이 100명은 넘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징맹이 고개 정상에는 1883년(고종 20년)에 쌓아 만든 ‘중심성’의 관문인 경명문루가 세워져 ‘공해루’(控海樓)라는 이름으로 현액 됐다.

이는 조정에서 연해의 관문인 이 고개에 성을 축조해 외침으로부터 인천과 부평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현재 중심성은 완전히 사라져 성을 쌓았던 흔적조차 알 길이 없다. 성문인 공해루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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