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11월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계획에 대한 정부의 공식 철회가 발표되고 한 달 뒤, 영흥도 주민들이 화력발전소 건설반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은 96년 10월 ‘대책회의’ 구성하고, 97년 6월 ‘범시민대책위’로 확대 개편해 대응했다.

비슷한 시기, 부평미군부대 반환을 위한 운동이 96년 5월 서명운동으로 시작됐다. 반환 운동은 이후 한, 미 양국이 반환 결정을 발표할 때까지 계속됐다.

영흥화전과 부평미군부대는 90년대 후반을 관통하는 인천지역 시민사회의 주요 현안이었다.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이에 연대를 통해 끈기있게 대처했다. 답동성당에서는 1년이 넘게 천막 농성이 진행됐고 부평미군부대 앞에서는 2년 가까이 천막 농성이 계속됐다.

● 영흥도 화력발전소 반대 운동

1991년 4월, 동력자원부는 영흥도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국토이용계획을 1차 변경하고 환경영향평가에 착수했다. 국내 전력생산량의 35%에 이르는 960만Kw를 중국산 유연탄 발전기 80만Kw급 12기를 건설해 생산하려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규모 화력발전소가 영흥도에서 가동될 경우 아황산가스, 질소산화물, 분진 등이 편서풍을 타고 인천은 물론 부천, 안산, 수원, 서울까지 퍼져 수도권 대기오염을 심각히 악화 시킬 것이 우려됐다.

발전소 온배수 유출과 석탄재 매립으로 인한 바다 오염 및 생태계 교란, 중금속·산성비로 인한 토양오염 등도 환경 문제로 제기됐다.그러나 정부는 95년 7월 2기 건설 계획을 승인하고 한전은 같은 해 11월 인천시에 113만평의 공유수면매립을 신청한다.

시민단체들은 94년 3월 영흥화전 건설기본계획이 확정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탈황, 탈질시설을 갖추더라도 엄청난 용량의 유연탄 화력발전인 만큼 피해가 불가피해, 청정연료로 바꾸던지 발전소를 분산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목요회는 95년 10월 한전 관계자와 학계,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흥도 화력발전소 영향평가에 대한 1차 토론회’를 개최, 대규모 화력발전소 건설로 야기될 대기 및 바다오염 등 환경피해의 심각성을 드러내며 여론을 환기시켰다.

96년 2월부터 화력발전 건설반대를 위한 영흥도 주민과 시민단체들의 집회 및 시위가 전개됐다. 주민들은 ‘영흥도 화력발전소 결사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화력건설처 사무실과 면사무소, 동인천역 등지서 집회, 농성을 벌였다. 6월에는 답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이 2개월에 걸쳐 계속됐다.

인천환경운동연합, 가톨릭환경연구소, 녹색연합, 목요회, 경실련, YMCA, 산업사회보건연구회 등 24개 시민단체는 이해 10월 ‘영흥도 화력발전소 반대를 위한 인천시민대책회의’를 결성하고 시장면담, 집회, 가두 서명, 시민토론회 등 활동에 나섰다. 인천시는 시민들의 반대여론에 매립 승인을 보류하고 현지 주민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통해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밝힌다.

97년 1월, 대책회의는 인천시와 민관공동조사단 구성에 합의했다.조사단은 독일, 일본 화력발전소 등을 방문하여 조사하다, 요코하마 시정부와 이소고 화력발전소 간 일본 최초의 환경협정을 확인한다.

97년 3월15일, 인천시는 공동조사단과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한전과 33개 조항의 환경협정을 체결하고, 2년여를 끌어온 공유수면 매립을 허가함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환경협정의 배출기준치는 기존 환경관련 법규를 강화한 것으로 배출가스의 아황산가스와 질소산화물의 농도기준이 각각 70ppm 이하, 미세먼지 30mg/s㎥ 이하였다.

그러나 주민대책위와 시민단체들은 총 12기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2기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만으로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며 환경영향평가의 전면 재실시와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영흥도 화력발전의 대기오염 확산영향 알아보기 위한 풍선날리기 행사가 97년 3월9일 발전소 부지 일대에서 주민 등 150여명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97년 4월3일 영흥도 대책위 주민들은 부지조성 공사현장 점거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5월14일 서주원 대책회의 집행위원장과 주민 5명을 기습연행, 모두 구속하고 농성 현장에 전경 수백명을 투입, 강경 진압했다.

이 때를 전후해 영흥화전과 관련해 구속, 수배된 주민수는 21명에 이르렀다. 현장에 공권력이 투입된 후 주민들은 5월17일 다시 답동성당 농성에 돌입했다.

대책회의는 6월10일 조직을 확대해 51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영흥도 유연탄 화력발전소 건설반대 범시민대책위’를 결성했다. 범시민대책위에 인천연합, 인천민중연합 등과 종교·노동단체등이 가세했다. 답동성당 농성은 98년 6월까지 370일간 계속됐다.

99년 들어서도 반대운동이 지속된 가운데 이해 9월 1호기 굴착공사가 시작됐다. 환경부는 96년 12월, 인천 전지역을 청정연료 사용지역으로 고시했으나, 이듬해 4월 이를 일부 변경하여 1, 2호기를 허용했다.

2001년 12월 환경부는 이 청정연료 사용 고시를 다시 개정, ‘1, 2호기에 허용된 대기오염배출 총량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3, 4호기의 증설을 허용했다. 공해방지 시설을 강화한 영흥화전에는 1, 2호기가 가동중이고 3, 4호기는 2009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있다.

산업자원부는 2006년 12월 5, 6호기 증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인천지역 환경단체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전력수급 계획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환경부가 또 다시 고시를 개정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부평미군부대 반환운동

96년 9월20일, 인천지역 34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우리땅 부평미군부대 되찾기 및 시민공원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시민회의) 발족식이 부평신협 강당에서 개최됐다.




(▲부평미군부대를 돌려받기 위한 주민들의 운동은 부대 주변을 에워싸는 인간띠 운동으로 이어졌다. 인간띠운동은 2000년 9월30일 부대 정문을 중심으로 1.5㎞에 걸쳐 이뤄졌다.)

시민회의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노동자 통일대 백두, 우리밀살리기, 부평구약사회, 인천교구 사제수요모임, 진보정치연합, 민중교회연합, 평화와 참여로가는 시민문화센터, 민주노총 인천본부 등이 참여했고 박동일 목사, 강광 인천대 교수, 선일 스님이 공동대표로 선임됐다.

부평미군부대(캠프마켓) 반환 운동은 96년 5월 인천연합 주최로 부평역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기념식에서 결의돼, 일주일 후 1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함으로 본격화됐다. 이후 7월8일 인천연합과 시민문화센터, 민중교회연합 등 14개 단체가 중심이 돼 ‘인간띠잇기 사업본부’를 구성하고 역량을 모았다.

그러나 8월11일 부대 앞 인간띠잇기 행사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고 학생, 시민 64명이 연행되어 8명이 불구속 입건되고 40여명이 구류 등의 처벌을 받는 사태를 빚었다. 부평미군부대 문제는 중요 지역 사안으로 부각됐다.

한편 시민회의 발족을 위한 준비모임 과정에서 부평지역을 중심으로 한 단체들은 시민회의의 활동 방향에 이견을 빚어 9월 발족을 앞두고 참여를 보류했다. 이들 단체들은 97년 3월 부평구청 강당에서 ‘부평미군부대 공원화추진 시민협의회’(공추협)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공추협에는 부평시민모임, 인천감리교목회자협의회, 부평사랑회, 부평청년회의소, 산곡·부평동 주민대책위, 부평시장농산물상인연합회 등 6개 단체가 참여했다.

시민회의는 준비 과정에 미군부대 철수냐, 이전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고, 참여 단체를 놓고도 논쟁이 있었다. 준비모임은 명칭과 구호를 ‘철수’나 ‘이전’이 아닌 ‘되찾기’(반환)로 잡았다.

시민회의는 발족 후 수련회, 시민공청회 등을 통해 캠프마켓으로 인한 지역 교통망 단절 등 생활 민원에서 부터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의 문제까지 여론을 환기시키며 반환 운동을 벌여나갔다. 캠프마켓 앞에서 매주 토요집회를 열어나갔고, 서명운동은 4개월 만에 5만명의 서명자를 확보했다.

97년 2월20일 시민회의는 인천과 의정부, 평택, 수원 등 미군기지가 소재한 지역의 시민 44명으로 시찰단을 구성해 일본 오끼나와의 반기지 시민운동단체를 방문, 연대를 모색했다. 그 일환으로 오끼나와 미군부대 기지사용계약 만료일에 맞춰 이 해 5월14일 양국 각 지역에서 인간띠잇기 행사를 진행키로 합의했다.

당일 대구, 평택, 서울지역과 함께 인천은 일본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회의’ ‘공추협’ 공동으로 캠프마켓 앞에서 ‘인천시민 걷기대회’를 개최했다. 시민회의는 2000년 5월25일부터 부대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매일 집회와 농성을 벌였다. 농성은 반환 계획이 발표될 때까지 674일 동안 계속됐다.

공추협은 발족 후 국회 및 정부에 대한 청원서명운동을 개시하는 한편, 97년 11월경 대선 후보들에게 부대 이전에 관한 공약을 물어 정치권 의제로 올려놓았다. 대선 후보들은 모두 캠프마켓 이전과 공원조성을 공약했다. 이어 지방선거에 출마한 부평지역 후보자들에 대한 정책설문조사를 벌여나가며 캠프마켓의 문제가 이념의 문제보다 지역의 현안임을 주민들에 인식시켜나갔다.

공추협은 2000년 인천지역 28개 시민단체들로 ‘불평등한 소파협정 개정과 부평미군부대 이전을 위한 인간띠 잇기 추진본부’를 구성했다. 상임공동대표로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 오순부 대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오용호 신부,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 민주당 박상규 인천시지부장, 한나라당 조진형 인천시지부장을 선임했다. 공추협은 1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9월30일 미군부대 둘레를 에워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성사시켰다.

이어 2001년 7월, 부평미군부대 이전을 위해 최초로 합법적인 주민투표가 가능한 조례 제정을 위한 청원서명운동을 추진했다. 공추협은 아파트 부녀회장단 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부평미군부대 이전에 관한 (찬반) 구민투표’ 조례 제정에 1만5천4백명의 서명을 받아 구의회에 청원했다. 그리고 구의회와 구청은 이를 받아 조례를 제정했다. 그러나 인천시의 거부로 공포되지 못했다. 2002년 3월29일 한, 미 양국은 부평미군부대를 2008년까지 반환키로 결정한다고 발표함으로 운동은 일단락 됐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