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 전사의 후손들
야만인이란 문화가 미개하여 덕의심이 없고 몰상식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고대 로마인이 변방의 게르만 인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신대륙에 건너갔던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경우는 그들의 영토를 빼앗고 그들을 학살하던 백인들의 뻔뻔스러움과 오만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이지만, 고대 게르만족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경우는 제법 타당한 경우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이후인 5세기부터 15세기의 중세유럽을 역사가들이 한때 암흑시대(Dark Ages)라고 명명했던 이유는 이 게르만족들에 의해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럽은 야만인으로 취급되었던 게르만 민족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슬람교도인 사라센족의 침공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한 게르만 전사 샤를르 마르텔(Charles Martel)의 손자인 샤를르마뉴(Charlemagne)가 서로마제국의 옛날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여 신성로마제국을 건립하였는데, 후대에 와서 이 신성로마제국이 갈라지며 생겨난 국가들이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섬나라 영국 역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에 그곳으로 건너간 앵글로 족과 색슨 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오늘날 유럽의 주인공은 국적에 불문하고 단연 게르만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을 건설한 주역이 영국의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이민이었으며, 미국의 현대판 귀족이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분류된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미국과 유럽중심의 21세기는 그야말로 게르만 시대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민족으로 성장한 게르만 후손들의 핏속엔 선조들의 야만성이 아직도 잠재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의 영웅인 잉글랜드 플랜테지넷 왕조의 사자 왕 리처드 1세의 어머니는 전쟁의 영웅이었던 그에게 야만인의 혈통 때문에 그가 전쟁을 즐긴다고 비난한 바 있었다.

일찍이 남편이었던 헨리 2세에게 버림받아 일생의 반 이상을 감금생활로 보냈던 이 비운의 왕비 말처럼, 실제로 유럽 중세의 역사는 상당부분이 피로 얼룩져 있다. 그들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위해 그리고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야만적 전사의 기질은 세계의 평화군을 자처하는 미군의 호전성에서도 곧잘 확인된다.

아시아의 야만인
우리에게 서양문화의 정수로 인식되고 있는 기사도 정신은 사실 너무도 호전적인 중세의 게르만 전사들을 온순하게 길들이기 위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기사도 정신을 체계적으로 교육한 덕분에 서양 야만인의 후손들은 아시아의 야만족 후손들에 비해서 그나마 양심적인 문화를 갖게 된 것 같다. 그 증거로서 2차 세계대전을 유발시켰던 독일인들이 유태인 학살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독일인들의 행동은 아직까지도 한반도 침략을 진출이라고 우기며,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아시아의 야만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서양문화의 미덕중의 하나이다.

어쨌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때 사용되는 야만인이란 단어를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데 사용한 프랑스의 작가가 있다. 1984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앙리 미쇼(Henri Michaux)란 작가가 바로 그 인물인데, 그는 1933년 인도, 중국, 일본, 한국에 대한 여행기를 출간하면서 자신이 아시아의 문화에 무지한 것 같다는 겸손의 의미에서 그 책 제목을 「아시아의 야만인(Un barbare en Asie)」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 대륙이 긴장 속에서 마비되어 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내가 단순했고 무지했으며, 이 대륙의 신비를 벗겨보겠다는 환상에 젖어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일본이 흥분했던, 극도로 흥분했던 시대, 그래서 전쟁을 공언하고, 전쟁을 노래하고, 전쟁을 확언하면서, 행진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위협하고, 괴롭히고, 폭격하고, 습격하고, 침략하고, 파괴하며, 테러를 자행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중국이 내몰리면서 침범당하고, 위협받고, 분열되고, 그래서 결코 재건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스스로 불신하고 폐쇄적이 되어, 어떤 정책이나 무력 또는 그때까지 경험한 바 있는 그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이미 혼란해진 문화와 자신이 처한 절박한 위기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인도가 허약한 모습으로 예기치 않았던 방법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통치하고 있던 강력한 지배 민족에게 어설프게 통치권 반납의 요구를 시도하고 있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리 미쇼의 말처럼 1930년대의 중국과 인도는 서구열강의 야만인들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반면, 아시아의 대표적인 야만 국가였던 일본은 서양 오랑캐들의 산업기술과 함께 그들의 야만적 행동도 재빠르게 모방했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열등의식에 대한 보상을 주변국들에 대한 전쟁과 폭력으로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이 아시아의 야만인들은 지금까지도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인들의 이런 성향은 어쩌면 그들의 태생적 기질 문제인지도 모른다. 앙리 미쇼 역시 이 점을 잘 간파한 것 같다.

“일본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하(大河)다. 대하는 지혜와 평화를 가르쳐준다는 중국의 속담이 있다. 그런데 일본엔 대하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화산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용암과 화산재와 불행만을 안겨주는 화산 말이다.”

이처럼 일본인의 성향을 호전적인 화산의 기질로 특징짓고 있는 앙리 미쇼는 전통음악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파악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전음악은 바람의 신음소리를 닮았다. 한국의 고전음악 역시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그 음악에는 아시아의 모든 황인종들로부터 한국인을 구분 짓는 독특한 열정이 내재되어 있다.”

미쇼가 지적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열정’ 덕분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수탈과 민족상잔의 폐허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이 열정을 바탕으로 우리의 태극전사들은 월드컵 신화에 도전하고 있으며, 우리의 붉은 악마는 세계를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그런데 이 열정이 때로는 우리를 너무 편향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나친 서구화 경향은 우리 문화의 고유한 특질인 정신적인 측면보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삶의 물질적인 측면만을 중시하려는 현상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조차 순수학문인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경시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서양 철학은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고 생명을 단축시키지만, 동양의 철학은 머리숱을 늘려주고 생명을 연장시켜준다”는 미쇼의 말을 한번쯤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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