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쳐든다. 늘 하던 대로 뒷부분에 있는 문화칼럼부터 읽는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칼럼이다. 작가는 영화를 봐도 사회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는구나 싶다.

‘바람난 가족’이란 영화에 관한 기사다. 그 영화 역시 요즘 우리 국내 영화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무척 야하다며 비판하는 사람, “우리 영화도 색상이나 배우들의 연기 등등이 정말 최고가 되었어.”, “보기 민망하다”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 화면의 색이나 연기자의 야한 장면이야 그럴 수 있지 싶다고 나름대로 평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소설가는 영화의 한 내용을 통해서 사회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교통사고 처리과정에서 피해자인 사람을 억울하게 가해자로 만들었고, 피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로 몰아붙인 그 사람의 아이를 공사장 높은 곳에 데려가서 떨어뜨린다. 그 장면을 끔찍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그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문제 삼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칼럼을 쓴 작가는 ‘할리우드에도 없는데’ 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를 도구로 이용한 영화를 볼 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진정 인간미란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그 작가의 글을 읽고 나니 정말 그럴 수도 있으려니 싶다. 그 정도의 해석이나 평가는 내려야하련만 나 판단은…. 언제부터 내게 이런 잔인한 일면이 있었나 싶었다.

습관대로 다음날 신문을 펼쳤다. 독자투고란에 예의 그 작가의 칼럼에 관한 의견이 재수록되어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어제의 그 글을 반박하는 글이었다. 그래 맞아. 표현의 자유. 영화에서 주제를 강조하려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작가는 너무 예민하게 ‘사인용 식탁’(영화제목)을 예로 들면서 우리 국산 영화의 잔인함을 비판하고 있었다. 나를 자책했던 일이 또다시 한심해 보였다.

도대체 내 생각은 어느 것인가. 이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이 반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또 그 이야기가 맞는 듯하고… 어느 도사가 다투는 제자의 이야기를 듣더니 “자네 이야기가 맞네, 아! 자네 이야기도 맞네 그려’ 했다던가. 도사가 아닌 난 참으로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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