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기름을 물에 불린다. 내일이 아버님의 기일이라 감주를 하려 한다. 따뜻한 물에 반나절쯤 불렸다가 자루에 넣고 몇 번을 야물야물 주물러낸다. 그 물을 가라앉히기를 반복해 말간물만 보온밥통에 넣고 흰쌀밥과 함께 삭힌다. 적당한 온도 속에서 밥알은 백골이 진토 되는 아픔을 당해야 한다. 아주 녹아버려도 안 되고, 밥알이 삭되 온전한 모양을 이뤄야만 한다.

6시간쯤 보온밥통에서 적당히 삭을 때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잠을 자도 안 되며 예쁘게 삭을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고 어느 요리전문가는 말했다. 약간의 긴장을 해야 하는 것은 시간의 차이가 아니라, 정성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밥통 안에는 도를 닦은 듯한 하얀 밥알들이 동동 떠오르며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커다란 들통으로 옮겨 퍽퍽 끓여내면 그제야 감주가 완성된다. 거기서 건져낸 밥알을 냉수에 헹구어 식혜에 쓰기도 한다. 식혜에 띄우는 밥알이 버들잎 역할을 한다던가.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도 그만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어느 수도자가 그 같은 고행을 견디겠는가. 서커스를 하는 작은 소녀들을 볼라치면 식혜에 떠 있는 하얀 밥알 같다. 온몸을 유연하게 삭히다 못해 녹아드는 그녀들을 볼 때 측은지심이 든다. 얼마만큼의 고된 훈련과 노력 끝에 그리될 수 있을까 해서다.

감주가, 거듭나기 위해 삭고 있다면 나는 세상 끝나는 날을 향해 육신이 삭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니, 어느 정도 삭히고 비워야 다시 될 수 있는 것인가. 천도가 훨씬 넘는 가마를 거치는 도자기가 있고 숯덩이가 있거늘, 나는 세상 떠날 때나 그리 될까. 너무 부끄러워 보리싹 자루를 슬그머니 뒤로 놓는다. 언젠가 내 자신을 우려내기에 재도전을 하려고.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