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을 ‘공공의식 결핍증’ 환자라고 진단한 사람이 있다. 그것도 ‘경증환자’가 아니라 ‘중증환자’라는 이야기다. 자학적인 말 같기도 하고 심하게 과장된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정에 반발만 하고 있어서는 우리에게 아무 소득이 없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겸허하게 우리의 행동이나 의식을 성찰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얼마 전 내가 우체국에서 겪은 일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내 옆에서 큰 소리로 개가 짖는다. 몇 평 안 되는 우체국에서 개가 짖었으니 어찌 되겠는가.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선 개에게 가더니 곧 개 줄을 잡고 있는 처녀에게 옮겨 간다. 곱지않은 시선들이다. 한데 해괴한 것은 그 처녀의 태도다. 그렇게 실례를 했으면 무슨 미안하다는 표시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개를 끌고 빨리 밖으로 나가는 게 도리다. 그런데도 개 줄을 잡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그 처녀는 우체국에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누구를 따라온 것 같았다. 박으로 끌고 나가지 않은 것은 개가 더는 짖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한데 웬 일인가. 또 짖으려고 으르렁거린다. 내가 “여기는 공무를 보는 공공 장소인데...” 하면서 불평을 하자, 그제서야 개에게 무어라고 하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개가 퇴장하자 이제는 여고생 둘이 등장한다. 그 중 한 사람은 들고 있던 아이스케이크의 껍질을 벗기더니, 그걸 바닥에 팽개친다. 소리를 내며 아이스케이크를 빤다. 가금 함께 온 친구와 큰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볼 일을 끝냈기 때문에 우체국을 나오고 말았지만, 위에서 본 일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집에서 자라나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저들의 교양 수준은?
쓰다 보니, 여자들 이야기만 했지만,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종이컵을 공중전화 부스에 던지고 가는 아저씨도 몇 명 보았다. 기가 찰 일이 아닌가.

일반인은 또 그렇다 치자. 지성인들이 모였다는 대학은 어떤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지성인이라는 교수를 보자. 우선 전화 사용하는 태도부터가 문제다. 교수가 쓴 전화 사용료는 학교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다. 딴 대학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그랬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시시한 사적인 이야기를 정도 이상으로 오래 한다. 얼핏 들어봐도, 정말 너절한 내용이다. 필요할 때 잠시 사용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나. 좀 오래 전 이야기다. 사회 단체의 여러 감투를 쓰고 있는 어떤 교수는 휴무일인 토요일에 ‘조용히’ 연구실을 찾아온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댄다. 토요일에 연구실을 찾는 것은 아마 전화하는 모습을 딴 사람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조교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로학생(일정한 수당을 받고 교수실에서 일하는 학생)은 어떤가. 아예 책상 위에 엎드려 시시덕거리는데, 그게 한도 끝도 없다. 자기 집 전화 같으면 그렇게 쓸 수 있을까. 학생들은 또 어떤가. 다른 건 그만 두고 화단을 한 번 보자. 던져 버린 허연 종이컵들이 화단 이곳저곳을 굴러다닌다. 버려진 교양이요, 폐기된 지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우리 국민의 공공의식 결핍증을 지적하였다. 물론 옛날보다는 많이 나앚ㄴ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뾰족한 묘안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우선 지각 있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하고 주변 사람들을 가르치는 수바ㄲ에 없다. 이밖에 무슨 수가 있겠는가.

끝으로 말해 두고 싶은 점은, 공공의식이 결핍된 토양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참된 민주주의가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를 잠시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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