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자연의 재현’이라는 숙명적 부담에서 해방된 지 어언 한 세기가 흘렀다. 지난 100년간 미술가들은 현실과 삶의 접점에서 예술의 순수성, 또는 절대미를 강조한 모더니즘미학을 지지대로 곡예하며 공간, 형태, 선, 매체, 질감 등을 모토로 다양한 형식실험을 즐겨왔다. 재현의 의무에서 해방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미술가들의 특권이자 일종의 소명과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입장에서 돌아볼 때 그 지지대는 삭은 동아줄처럼 부실하고 곡예사는 그 위에서 외줄타기 하는 광대처럼 고독하고 또 위태롭다. 소수이나마 이에 열광하며 우러러보던 관객들도 편협한 대중주의적 취향으로 눈을 돌려버린 지 오래다.

이 지점에 조각가 최성철과 그의 작품세계가 있다. 형상과 비형상, 물질과 공간, 해체와 구축, 채색과 탈색, 추상과 재현 등 여러 상대적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최성철의 조각은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선상에 있는 듯 모호하다. 기존의 조각이 3차원적 공간 안에서 형태, 매스, 공간의 문제를 주된 테제로 내세웠다면 최성철은 여기에 고도의 지적 논리가 내재된 색채를 개입시킴으로써 ‘조각의 회화적 속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기존 조각의 설명적 원리들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조각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각은 더욱 풍부한 지적 정의와 확장된 개념을 획득한다.
물론 조각에 채색이 가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이 이전의 채색조각과 다른 점은 고대 자연주의로부터의 일탈이자 근대 물질주의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이중의 탈주를 함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각과 회화의 속성을 모두 추구하는 양자선택의 의미일 수도 또 그 역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조각에서 색채는 대상에 부여된 법칙에 순응함으로써 윤곽이 그에게 할당하는 영역을 채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조각의 고정된 기능을 확장하거나 반대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조각은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시행착오의 결과로 이룩된 산물이다. 이미지의 자명성을 포기한 모더니즘 미술이 형식의 유희를 즐겼다고는 하나 그 것이 뼈를 깎는 인고의 과정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조각가가 재료를 선택하여 깎고 다듬어 형태를 만들어 가는 도중에 돌출하는 형태적 유동성에서 ‘어떤 형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긴장과 고독, 그리고 노동으로 점철된 피말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형태의 재료를 고갈시켜 극단적인 단순성을 추구하거나 엄격한 규칙들을 적용하여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는 일, 그리고 풍부한 변용과 놀랍도록 환상적인 변형을 통해 재료가 지닌 활력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일 등은 사실조각과 결별한 그에게 지워진 숙명적 부담이다.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와 동대학원, 이태리 까라라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인하대에 출강중이다.

/경모 미술평론가·인천대학교 미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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