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미술관없는 인천시, 인천 출신 당대 최고 서예가 작품도 못지켜

인천 출신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검여 유희강(1911~1976년) 선생의 작품과 유품 1000여점이 유가족의 기증 의사에도 불구하고 인천시 당국의 홀대로 서울에 한 대학으로 넘어간것으로 알려졌다.

검여 유희강 선생-인천문화재단 제공-

 

 

 

 

 

 

 

 

 

 

 

성균관대학교가 검여 선생의 ‘관서악부(關西樂府)’ 등 100여 점을 유족에게 기증받아 공개하는 특별전 ‘검무(劍舞)’를 31일부터 진행한다고 밝힌것이다. 성대박물관은 유희강 선생 작품과 유품을 상설 전시장하는 ‘관서악부실’도 공개한다.
검여의 대표작이자 유작인 관서악부는 길이만 34m에 이르는 종이에 글씨가 빼곡이 적혀 있는 대작으로 손으로 써 내려 간 글자 3024자가 때로는 엄숙하게, 때로는 춤을 추듯 흐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서악부

검여 유희강(1911~1976년) 선생은 1911년 현재 검암 시천동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38년 중국 베이징 동방문화학회(東方文化學會)에서 중국의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했다. 또 상하이 미술연구소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45년에는 임시정부 광복군지대장 비서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46년 귀국해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인천 시립박물관장, 1955년 대동서화 동연회(大東書畵硏究會) 회장과 미술가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1년 이후 국선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한국서예가협회 회장과 인천시립도서관 관장,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등을 지냈다.

이런 활동이외에도 검여선생은 인천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켰고 ‘검여서숙(劍如書塾)’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하는등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졌으나 실어증과 반신불수를 극복하고 오른손이 마비된 상태에서 왼손으로 쓴 글씨로 1971년 제3회 개인전을 열어 반향을 일으켰다.

검여 유희강의 우수서(右手書) 대표작 완당정게(阮堂靜偈·1965년·왼쪽)와 붉은 종이에 눈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좌수서(左手書) 대표작 영설(詠雪·1974년). 성균관대박물관 제공

이런 검여 선생의 작품과 유품을 인천시가 스스로 날려버린것이다. 유가족이 10여 년 인천시에 습작 600점과 작품 400점 등 1000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시는 2007년 서구 시천동 검암근린공원(검여 생가 터)에 검여 선생 자료관을 짓겠다고 했으나 진행되지 않았고 유가족은 기념관 설립의사를 밝힌 성균관대에 조건없이 기증한것이다. 현재도 검여선생 생가터엔 기념 표지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서주선 인천미술협회 회장은 “이번 검여 선생과 당대에 평가받는 동정 박세림 선생의 작품도 대전대학교에 전시되어있다.경제규모2위, 인구 300만 도시로써 새로운 문화 컨텐츠를 개발해도 모자란데 있는 작품도 지켜내지 못한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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