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느 일이라고 해서 양면성을 갖지 않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아니 찾기 어렵다기보다도 찾을 수 없다 라고 하는 편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실제와 더욱 부합한다.

굳이 도가의 전통적인 음양의 논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밝음과 어둠, 높음과 낮음, 크고 작음, 안과 밖, 먹고 먹힘 같은 자연계의 모습이 그렇거니와 미,추,선,악,정,사,강,약,빈,부,귀,천… 어떠한 인생의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대조군을 갖게 마련이고 그러한 대립은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이래 사라진 적도 없고 아마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대조군들은 언제라도 그 위치를 순간에 서로 바꾸기도 하고 천만가지 갈래로 다시 분화하기도 하여 인간의 이성을 항상 어지럽게 희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가치관에 고착하는 인간의 이성은 대개 미천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이러한 각성으로부터 중용과 과유불급의 현실적인 깨달음이 생겨나고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힘을 얻는다. 힌두의 아바타라는 만물에 대한 화신(化神)의 인식과 불가의 불이(不二)사상이 모두 이러한 삼라만상의 무한다면성에 대한 깨달음을 기초로 한다.

문재인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무려 100대 과제에 400여 개가 넘는 세부계획을 망라한 방대한 규모다. 이루 열거하기 어렵고 더욱이 일일이 외우기는 더욱 불가한 일이지만 이러한 계획을 일관하고 있는 정신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라는 것이 이 계획을 입안한 국정자문위의 책임자와 대통령 자신의 설명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시종일관 이 정부의 지휘책임자들이 강조해 온 것이 “촛불혁명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신임 국무총리는 취임 제1성으로 “모든 공직자들은 촛불혁명 정신 실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기는 하다. 이 정권의 탄생에 가장 압도적인 기여를 한 것이 광화문의 촛불시위이었다는 데에 이론이 있기 힘들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출발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대선불복의 흐름은 국정원 댓글 사건, 문고리 삼인방을 비롯한 대통령의 고집불통에 가까운 측근의 비호, 세월호 사건, 몇 몇 수석의 비리 등 호재를 거쳐 최순실 국정 농단을 계기로 광화문의 촛불 발화점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박근혜 정권을 무능, 부도덕, 부패 정권으로 낙인찍는데 성공하였다. 마침 공천 싸움질과 그 후유증으로 총선에 참패하여 일패도지의 지경에 이른 당시 여당의 파편화한 세력들이 애초에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이 광화문의 촛불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거나 그 속에 내재한 의미들에 대한 논쟁을 전개하기에는 적합한 시기가 아닐 수 있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로 인한 승리의 수혜자가 있고 그에 대해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상대방들이 있으며 그 한 복판에서 희생된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현재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 나라의 5년 살림을 끌어갈 목표가 촛불정신의 실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현 정부의 인식에는 논리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광복 이후에도 무척 여러 번의 민중적인 반정부 투쟁의 경험을 쌓아왔다. 4·19, 5·18, 6·10 등 전 국민들이 동참하는 격렬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경력이 오늘 대한민국의 역사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의 과정에 이번처럼 국민 스스로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서로 부딪친 경우는 없었다. 더욱이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을 이토록 드러내면서 민중 대 민중의 충돌을 빚었던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나는 지금, 그때 태극기를 들었던 세력들이 그러한 선택을 일시적이었던 과오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반성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촛불정신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가 줄기차게 추구하여왔던 부패와 부조리의 추방 이외에 어떤 새로운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나라에는 촛불을 들지 않았던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고 우리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가 이토록 촛불만을 강조한다면, 하나의 가치관에만 봉사하는 모든 권력 아래에서 그랬듯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빛을 잃을 것이다. 권력의 유연성과 합리성이 사라질 때 사회는 또 다시 경직되고 분열의 수렁에 빠질 것이고 이데올로기화한 권력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촛불을 부르게 될 것이다. 고집과 패거리 그것 이상의 적폐가 따로 있을 것인가.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흥분해서 고집을 부릴 때 그 사람이 얼마만큼 어리석은가가 드러난다.”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에 남긴 말이다./하석용 홍익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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