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성 타이안시 대묘박물관의 동어좌에 있는 한 비감에는 진나라 때 조각된 태산각석 한 조각이 보존되고 있는데, 이는 태산 역사를 기록하는 최초의 각석이다.

각석의 전반 부분은 진시황이 중국의 문자를 통일한 후 태산을 순시할 때 승상 이사가 소전으로 조각한 것으로 진시황의 태산행이 기록돼 있다. 이 각석은 역사적 의미는 물론 서예가치도 매우 높아 국보로 여겨지고 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6국(한, 조, 위, 초, 연, 제)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가 됐다. 왕위에 오른 진시황은 후반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 동방 지역을 순시하는 일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세 번에 걸쳐 태산 봉선(제왕이 태산에 올라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지냈다. 이는 역대 제왕 중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진시황은 왜 이런 행보를 보였을까.

천하를 점령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키는 것은 더 어렵다

중국 고대 시기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사방에 적들이 있어 황제가 궁궐 밖에 나가 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진시황은 궁궐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도 있는데 왜 순시를 나갔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3년째에 일어난 암살 사건부터 얘기해야 한다.

어느날, 진시황의 마차 행렬이 박랑사(오늘날 허난성 위안양현 동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도로위에는 모래 언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행렬의 속도가 느려졌을 때 갑자기 산 위에서 큰 망치 하나가 진시황의 마차로 날아들었다. 부서진 마차안을 살폈을 때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시황이 미리 위험을 예견하고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장량자진’(서한 시기 명신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는 사건)이다. 이처럼 당시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이들은 한두명이 아니었다. 진시황은 6국의 백성들이 전정으로 그를 따르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평생을 기울여 6국을 통일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시황은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행했고, 순시를 나가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동방 순시와 봉선의 고심

진시황은 5번의 동방 순시 중 3번을 제노(현재 산둥)지역을 향했다. 진시황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진시황은 나라의 동남지역에 대해 항상 불안해했고, 화근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사기‧고조본기’에는 음양가 초남공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초나라다”라는 예언을 한 기록이 있다. 당시의 초나라는 바로 진나라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시황이 동남지역을 우려한 이유는 또 있다. 6국 중에 마지막까지 투항한 제나라도 동남쪽에 있었다. 춘추전국 시기 제나라는 진나라에 이어 두 번째 강국이었다. 진나라에 항복하기 전 제나라는 40년간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병력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제나라의 존재에 대해 항상 불안해 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동남쪽에 위치한 제나라와 초나라를 전국 대통일의 국면에 융합시키기 위해 동방지역 순시 외에 다른 중요한 방법 한가지가 바로 태산 봉선이었다.

태산대학 태산연구소의 저우잉 연구원은 “봉선이 실은 제왕들이 하늘과 땅 간에 하는 대화인데 위로 하늘, 아래로 땅과 통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동방에 있는 영산인 태산이란 곳”이라고 설명했다. 태산학원의 류씽순 부교수는 “신지황의 태산 봉선은 천하 대통일이 이뤄진다는 것을 선고하는 동시에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와 조치, 그리고 천하에 대한 자신의 공덕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이런 종교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전국 대통일을 위한 태산봉선

진시황은 봉선예를 거행할 때 진나라 웅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하늘에게 제사를 지냈고, 문무대신들을 이끌고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했다. 하지만 ‘전국을 통일시키고 천하를 점유하다’라는 목적으로 봉선에 나선 진시황은 제노지역 유생들의 봉선식에 대한 ‘하늘에 대한 제사예의’ 건의를 무시했고, 이로인해 제노지역 사대부들과의 갈등이 한층 심화됐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세운 진나라는 15년만에 멸망했다. 하지만 진시황은 동방지역 순시와 태산 봉선을 통해 중국의 진정한 대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귀신을 잘 그린 나빙

양저우 신시가에 있는 깊숙하고 그윽한 미퉈골목에는 전형적인 양저우 민가가 있다. 집안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두 곳을 가리는 대문 두 짝이 있고, 대문앞에는 조벽장은 물론 흔한 벽돌조차도 없었다.

이곳이 청나라 건륭제 때 양저우에서 활약한 여덟명의 화가 ‘양주팔괴’ 중 한명인 나빙의 생가 ‘주초시림’이다.

나빙은 어렸을 때 똑똑하고 부지런했다. 기억력도 대단히 좋아 책을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탓에 나빙은 급제하기 위해 공부하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먹고 살기 위해 공부했다.

양주팔괴 중 으뜸인 김농에게 지도를 받은 나빙은 김농이 별세하자 건륭 36년(1771년) 도성에 들어가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나빙은 회화계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다. 냉정한 세상의 큰 좌절은 나빙에게 풍부하고 강렬한 창작영감을 불러왔다.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한 것이 나빙의 인생 역작인 ‘귀취도’다.

나빙은 과장된 기법으로 기괴한 귀신을 그려내 ‘귀취도’ 8폭을 그려냈다. 그가 그린 귀신은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도대체 누굴 그린 것인지도 가늠하기 힘들다. 당시의 사회현상을 그린 것인지에 대해 나빙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낮에 귀신을 알아볼 수 있는 파란 눈이 있어서 보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고 설명했다. ‘귀취도’는 나빙의 명성을 드높였고 ‘사회부패에 향한 비수’라고 불리게 됐다.

나빙은 건륭 44년(1779년) 두 번째로 상경했다. 그 기간에 아내인 방완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빙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 고생하다가 쓸쓸하게 양주로 돌아왔다. 세상물정을 겪어보고 깨닫게 된 나빙은 ‘귀취도’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귀신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빙은...

나빙(1733~1799년). 자는 둔부(遁夫), 호는 양봉(兩峰). 안후이 서현 출신, 청나라의 서화가. 양주팔괴 중 한 사람으로 대표작은 8폭의 ‘귀취도’ ‘물외풍표도’ ‘양봉사립도’ ‘단계추고도’ 등이 있다.
 

<자료제공=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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