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이후, 비계급적 주체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한 시민운동은 90년대 사회운동의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체제의 비민주적 관행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여전이 두텁게 벽을 치고 지역사회를 재단하려 했고, 환경의 문제를 경시한 개발 위주의 정책은 가속화됐다.

90년대 전반기, 6월 항쟁의 결과물 중 하나인 지방자치는 91년 지방의회 선거를 치르고 95년 6월의 첫 단체장 선출을 앞두고 있었다.

지방자치의 시행은 시민사회운동에 있어 민주화의 담론 뒤에 놓여있던 지역의 구체적인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 현안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 인천의 시민사회운동은 3차례 중요한 지역 현안과 맞닥뜨렸다. 계양산 종합위락단지 개발 계획(91.7)과 고질적인 선인학원 사태의 재발(92.1), 정부의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발표(94.12)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3개의 현안에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의지가 관철돼 향후 인천지역 시민운동의 형성과 도약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이 같은 성과는 6월 항쟁 이후 ‘구악의 청산’과 ‘지방자치’, ‘환경 보전’ 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이루고 지키려는 지역민들의 열의와, 계층을 넘어선 시민적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특히 ‘계양산’과 ‘선인학원’을 겪고 3년 후 발족하게된 ‘인천앞바다 핵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핵대협)의 활동은 보수와 진보적 인사, 시민단체와 민중진영, 현지 덕적 주민을 포괄한 탄탄한 지역 연대를 이뤄내는 성과를 통해 권력의 비민주, 비합리와의 싸움에서 굴업도를 지켜낸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계양산’과 ‘선인학원’ 사태가 발생한 91~92년은 인천지역 시민단체가 거의 결성되지 않았던 때였다. 단지 89년 설립된 목요회가 중심이 돼 여론을 모아갔고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결합해 추진위를 구성했다.

‘계양산살리기 범시민운동본부’ 준비위는 91년 10월 발족했고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 준비위는 92년 1월 구성됐다.

‘계양산 운동’에는 계양산 주변지역 교회와 성당, 사찰 등 종교 지도자와 대학교수, 목요회와 인사연 관계자들과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 회원 등이 결합했다.

‘선인학원 시민모임’은 6월 항쟁 이후 89년 3월 결성된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로부터 추동되기 시작했다.

교사협의회는 91년 인천대 교수협의회와 결합해 ‘범 선인학원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들의 요구로 목요회가 적극 대응하면서 시민모임이 결성됐다.

비슷한 시기, 함께 전개된 두 모임은 지역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현장의 주민, 교사 교수등의 결합체로 인천지역 초기 시민운동을 열어나가는 모범이 됐다.

한편 95년 1월 발족한 ‘핵대협’은 인천 시민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457명의 서명자 모임과 1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범 인천시민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운동’과 결합한 형태였다.

‘굴업도 반대운동’에는 당시 인천지역 민중민주진영을 대표해온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인천연합)을 비롯, 인천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인노대),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천사협), 민주화를위한 교수협의회, 인천노동상담소, 서해광장 등과 인천경실련, 인천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결합해있었다.

핵대협은 명실상부하게 현지주민과 인천 지역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연대기구로 출범할 수 있었다.



①계양산살리기 범시민운동


91년 7월, 인천시는 대양개발이 계양산 일대 자신 소유의 45만평 중 9만1천여평에 개발하려는 공원 계획을 허가하기로 하고 건설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대양개발이 개발하려는 공원은 케이블카를 비롯한 98종의 종합위락시설이 들어서는 것으로 6년에 걸쳐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대양개발은 90년 8월 1차로 계양공원 민자유치 사업을 신청했다가 지형의 과다 훼손으로 반려당한 이래 규모 축소, 인천시의 의견반영 등 조정을 거치며 4차례 계획서를 제출한 끝에 건설부 승인을 요청하게 됐다.

계양산살리기 범시민운동은 91년 9월 김종구 홍미영 한영환 최용규 등 초대 시, 구의회 의원과 이덕희 정희윤 등시민운동에 참여해온 12명이 모여 인천시의 계양공원 민자유치 개발에 문제를 제기하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접근키로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10월 ‘계양산 살리기 범시민운동본부 결성 준비위’를 결성하고 계양산 자연보호협의회와 종교계, 학계, 교육계, 시민 등 참여자들의 폭을 넓혀나갔다. 11월9일 준비위는 계산성당에서 시민공청회를 열고 1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다.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92년 1월24일 계산중앙감리교회에서 종교계를 비롯해 각계인사가 대거 참여하는 ‘계양산살리기 범시민운동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공동대표로는 계산교회 최세웅 목사, 가르멜 수도회한국지부장 정대식 신부, 홍재웅 인하대교수 등이 선임됐다. 집행위원장에 정요일 인하대교수, 운영위원에 최원식, 강광, 이진, 이도경 등 종교, 학계, 법조, 문화 등 각 분야 인사 2천여명이 추진위에 참여했다.

추진위는 오락시설물 위주의 대규모 공원개발은 자연생태계를 완전히 훼손하는 것이며, 인천의 가장 좋은 녹지상태의 계양산을 훼손한다면 주변에 막대한 환경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경고했다. 또 오락위주의 시설은 시민들의 휴식공간만 빼앗고 교통체증을 불러올 뿐 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추진위의 계양산개발 반대운동에 10만명이 서명하고 싸이클장에서의 집회에 5천명씩 참여하는 등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속에 인천시는 이듬해 개발 계획을 반려했다.




범선추는 92년 5월25일 교육부의 선인학원에 대한 종합감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②선인학원 사태와 시민모임

92년 1월20일, 중구 답동 인천중앙감리교회에서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 준비위가 결성됐다. 11년째 극단적인 파행을 반복해온 선인학원에 대해 시민사회가 본격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태는 결정적인 국면의 전환을 맞이했다.

선인학원은 81년 설립자가 학원운영과 관련한 비리로 구속돼 학원을 국가에 헌납했으나 이후 설립자의 재단복귀와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로 교수, 교사가 파면되는 등 파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91년 당시 선인학원은 인천 전체 중고교 재학생의 23%, 사립 중고교 학생의 47%를 점하고 있었고, 인천대와 대학원, 전문대를 포함, 16개 학교를 거느리는 거대 사학으로 ‘인천교육’을 상징했다.

그러나 교육기관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절대 부족한 설립자의 강압적이며 구시대인 교권 유린과 독단적인 학교 운영으로 교원들의 불만과 시민들의 우려를 키워왔다.

86년 3월 설립자는 건설본부 자문위원 이름으로 재단으로 복귀했다. 이와함께 파행운영이 재연되고 학내분규로 53일간의 휴교령이 내려지는 한편, 5명의 학생이 구속되는 사태로 이어지고 설립자는 다시 물러난다.

6월 항쟁을 겪은 후, 선인학원 교사들의 각성은 89년 3월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200여명이 참여하는 교사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91년 설립자의 재단 재복귀 우려가 심각해지면서 교사들과 인천대 교수들은 연대를 모색했다. 이 해 7월 인천대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와 초중고 교사, 교직원 등 370여명은 ‘범 선인학원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설립자의 비리를 폭로하는 청원서를 교육부와 청와대 등에 제출했다.

학원측은 92년 1월 장석우 인천대 교수협의회장과 교사대표 이세영, 총무 장재선 을 파면했다. 파면사태에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고 인천대 총학생회 간부 등은 총장실을 점거, 철야농성을 벌였다.

1월20일 발족한 시민의 모임 준비위의 발족을 계기로 선인학원 문제는 인천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각됐다.

시민모임은 이 때 선인학원의 국가헌납을 의결한 이사회 회의록을 찾아내고 ‘선인학원 기금 78억원이 설립자에 건내진 경위와 국가헌납 과정에 관한 진상보고서’를 발표한다. 81년 재단 설립자가 국가에 헌납한 재산 101억원중 상당액을 선인학원이 다시 돌려준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교육부는 설립자에게 64억원이 지급된 사실을 확인, 사립학교법 위반으로 결론 내리고 6월 관선이사의 파견을 발표한다.

선인학원 사태는 이듬해 6월 설립자 가 최기선 시장에게 권한 일체를 넘기는 기증서를 제출하고, 최 시장은 시·공립화 추진을 발표함에 따라 일단락됐다.

③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연대

94년 12월22일, 정부는 핵폐기장 최종후보지로 굴업도를 전격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 1천5백명 규모의 인천경비단을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창단했다. 정부는 또 이날 오전 이중 250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을 덕적도에 상륙시키면서 단숨에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굴업도 핵폐기장의 첫 번째 문제는 과학적인 검증을 우선하여 선정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저항이 적은 곳을 택했다는 데 있었다.




핵대협은 95년 3월25일 제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한 후 시민회관앞에서 거리행진을 벌였다.

인천연합, 인천환경운동연합 등은 12월23일 38개 단체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고 인천시민회관 앞에서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이중 16개 단체는 ‘범 인천시민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운동’을 꾸렸다.

이와 별도로 목요회 김병상 회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최원식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은 광범위한 범시민대책기구를 구성키로 하는 한편, 각계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서명작업을 전개해나갔다.

서명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인천앞바다 핵폐기장대책 범시민협의회’(인천핵대협) 준비위는 이어 ‘굴업도 반대운동’과 통합을 이뤘다.

1월24일 준비위는 인천핵대협 결성대회를 개최하고 상임대표에 김병상 신부와 지용택 이사장을 선출했다. 양재덕 인천연합 대표는 공동대표단으로, 16개 시민사회단체 대부분은 집행위원회에 참여했다. 양기구의 통합과 양 공동대표의 선임은 인천핵대협이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정부는 1월25일 공청회를 시작으로 지역협의회 구성,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고시를 강행하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2월 개최된 토론회에서 핵대협은 연구 용역작업을 토대로 정부의 입지선정에 있어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핵대협은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지정고시 철회를 요구하는 덕적 주민 등의 집회와 시위는 격화됐고 핵대협은 3월부터 세차례에 걸쳐 수천명씩 참여하는 궐기대회를 시민회관, 동인천역 등지서 열였다.

6.27 지방선거 국면에서 굴업도 핵폐기장 문제는 후보들의 반대와 비판적 입장이 드러나면서 최대 정치쟁점으로 부각됐다.

최기선 시장은 취임 후 인천핵대협의 요청을 받아들여 9월5일 핵폐기장 민관 합동조사단 구성계획안을 발표한다. 인천시의회도 ‘핵폐기장 특위’를 구성하고 전과 다른 관심을 기울이면서 국면은 서서히 전환됐다.

인천핵대협은 10월7일 굴업도 주변에서 활성단층 징후를 발견해 핵폐기장 추진이 어려울 것같다는 소식에 접한다.

정부는 11월30일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 고시를 해제한다고 최종 밝힘으로서 사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핵폐기장 선정은 2005년 11월 주민투표에서 경주로 결정돼 19년간 끌어온 국책사업은 마무리된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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