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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해운업의 효시 이운사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을 출입하는 외국기선이 증대함에 따라 대외무역이 확대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권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본 발달이 미약한 조선으로서는 초기 해운업을 정부 직영의 형태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1885년 전운국(轉運局)을 설치하고, 이듬해 해룡호(海龍號)·조양호(朝陽號)·광제호(廣濟號) 등의 기선을 구입하여 주로 세곡(稅穀) 운송을 전담했다.

근대 해운업이라면 타인화물을 운송하는 ‘타인 운송’의 단계로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893년 1월 민영준(閔泳駿), 정병하(鄭秉夏), 우경선(禹慶善) 등의 발의에 의해 전운국은 청으로부터 받은 20만 냥의 차관으로 이운사(利運社)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이운사는 전운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창룡호(蒼龍號) 외에 현익호(顯益號)·이운호(利運號)·경제호(慶濟號)·한양호(漢陽號) 등 총 5척의 기선을 소유하여 세곡운송 뿐 아니라 개인화물과 보통여객의 운송까지 취급하는 명실상부한 해운기업이 됐다.

그러나 부실한 경영방식과 실적 부진으로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다가, 갑오개혁으로 조세 금납화가 이뤄지자 주요 업무인 세곡운송마저 폐지되어 위기를 맞는다.

1894년 전운국이 혁파되고 새로 이운사를 관할하게 된 탁지아문(度支衙門)은 이운사의 경영 정상화 및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탁지아문은 동년 9월 이운사의 사옥과 창고, 현익호·창룡호·해룡호 등 기선 3척과 판선(板船) 14척의 운영권 일체를 인천항 상인들에게 맡겨 회사 운영을 민영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왕실에 진상하는 물품 및 관리의 수송도 이 회사에서 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했다.

이는 갑오정권의 자유주의적 상업정책에 따른 결과이며, 따라서 이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간해운업의 효시가 되는 회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의 이운사 사무실은 외리 226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운사의 기선이 청일전쟁 중에도 여전히 청국상인의 화물을 옌타이·톈진 등으로 수송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일본은 이운사 기선의 운용권을 차지하려고 조선 정부에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재정난에 처한 조선 정부에게 13만원의 차관을 연 8%의 저리로 제공하는 조건을 내세워 집요하게 교섭해 왔고, 결국 1895년 1월 이운사 소속 기선을 일본 우선회사에 위탁, 운영한다는 계약이 체결됨으로써 이운사의 업무는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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