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허만하 시집 ‘물은 목마름쪽으로 흐른다’ 중에서>

▶왜 높은 곳이 어두울까? 이 역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맑은 별빛과 군청색 밤하늘이다.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진 사람들은 도시의 한복판 평지를 차지한다. 어두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자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떠밀린다. 이 역전(逆轉)! 이 역전 때문에 불빛 휘황한 빌딩 숲의 높은 사람들은 맑은 별빛과 군청색 하늘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달동네는 반대로 평지이면서 도시의 가장 높은 변두리이다. 이곳에는 골목이 있고,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고, 삶의 그늘이 먼저 고이며, 스티로폼 상자 속에 나팔꽃씨를 심는 곳이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만이 별빛과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허만하의 이 상징의 높이는 단순한 전망을 위한 높이가 아니라 나팔꽃이 피는 삶의 원동력, 그 힘의 높이이며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인 것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주말 아침, 마음을 윤기나게 해줄 시 한편으로 독자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인천의 중견작가 김윤식 시인이 시의 숲에서 소중한 한편을 건져올립니다. 특별히 작품을 향하는 시인의 단상을 붙여 문학여행을 이끌어 갑니다. 오늘 ‘김윤식 시인의 시읽기’의 첫 작품을 소개합니다.

-----------

김윤식 시인
▲1947년 인천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 시 추천 등단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북어·2’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인천문인협회 회장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