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얼문화재단 30회 역사기행…진안·무주 등 일주
백제 중심지 익산 미륵사지·왕궁리 유적 탐방

   
왕궁리 석탑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현재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하고 청하니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 ‘국사’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 하였다-라 하였다. 진평왕은 각종 공인(工人)을 보내 역사를 도와주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사’에는 이 분을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독녀(獨女)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다.

여기서 ‘무왕(武王)’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은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마(薯)를 캐어 팔던 소년 서동이다.

무왕은 그의 어머니가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낳았다는 설과 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함께 존재한다. 또 그의 아내 역시 ‘남 몰래 시집가서 밤이면 서동이 만난다네’는 노래가 퍼져 귀양 보내진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는 설과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익산은 무왕의 고향이며 무왕이 세운 별도(別都·천도지)로 열두 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할 때 중요 거점이 됐던 곳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사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 백제의 세력 넓혀 삼국 통일을 꿈꾸기 위한 발원지다. 미륵사의 또다른 이름 왕흥사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세월의 두께 속에 내려앉았던 흔적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왕궁리(王宮里)의 왕궁도 그렇다. 왕궁에서 사찰로 바뀐 특별한 역사를 지닌 무왕의 성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토기와 와편, 석축, 금고리와 금판 등의 유물, 이것들을 만들던 공방의 흔적 등에서는 백제 왕궁의 풍경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오수가 차면 수로를 통해 배출되는 정화조 형식의 대형 토광화장실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카시아 향기 실려 오는 초여름 밤, 백제의 정원위로 펼쳐진 하늘에도, 꽃바람이 스치는 연못에도 훤한 보름달이 떴다. 저멀리 무왕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는 정원을 거닐며 강국의 꿈을 치열하게 다듬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물결을 따라 흐르는 연못의 달을 내려다 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휘영청 밝은 달이 혼자 떠다닌다. 백성과 함께 있으되 늘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한 왕과 같은 처지 인 것만 같다. 하지만 달밤 아래 그의 크고 긴 그림자는 상념도 두려움도 떨쳐낸 듯 흔들림이 없다.

그 달밤, 왕후는 미륵사 석탑아래에서 조아리고 합장을 한다. 탑을 따라 도는 그림자는 커지고 작아지길 수천 번. 달빛이 비춘 그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서른 해를 맞은 새얼문화재단의 역사기행은 여느 해보다 반갑고 즐거웠다. ‘마를 캐던 천민이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왕이 됐다’는 친근한 설화 때문이었을까. ‘서동’ 무왕과의 만남은 더욱 특별했고 뜻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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