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퍽, 타다닥···’ 샌드백을 두드리는 손놀림이 경쾌하다. 앳된 얼굴, 가냘픈 몸매의 여성복서다.

지난 달 20일 전북 정읍에서 열린 국제여자복싱협회(IFBA)의 3대 타이틀중 스트로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한 박지현(21·대풍체육관)이 그 주인공.

▲세계챔피언의 탄생
아마튜어 시절부터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는 중국의 노장 공진 선수와의 대결에서 박지현은 시종일관 유리한 경기를 펼친 끝에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최경량급인 스트로급 초대 챔피언에 당당히 등극했다.

박지현은 초반부터 접근전을 펼치며 적극 공세로 상대를 압도했으나 펀치 파괴력을 알고 있는 공진이 링 사이드를 돌면서 계속 피하고 주먹을 적중하지 못해 판정으로 이긴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162cm의 보통 키에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닌 박지현이지만 링 위에 오르면 굶주린 야생마 처럼 강펀치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형적인 인파이터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그녀의 주무기인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맞으면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

그의 전적은 6전 5승1패. 5승 중에서 네번을 KO로 장식할 정도로 펀치의 파괴력은 대단하다.

대풍체육관 이정국 관장은 “지현이는 권투에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다. 펀치력은 대단하지만 경기경험이 적어 운영능력이 다소 떨어진다. 훈련을 통해 노련미와 경기운영 능력만 키운다면 챔피언으로 롱런할 선수다”며 그녀를 칭찬했다.

흔히 뼈가 굵고 단단한 사람을 통뼈라고 부르는데 박지현의 골격이 유난히 단단하고 강해 권투하기에는 적절한 체격이라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박지현과 인천··· 그리고 복싱
박은 원래 탁구선수였다.

부평 토박이인 부모와 함께 부평구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도 부평시장 부근에서 살고 있는 짠물 출신이다.

부평동초교 4학년때 탁구와 인연을 맺은 뒤 중·고교와 대학을 모두 탁구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중·고교를 경기도에서 숙소 생활 하다 인천전문대에 진학하면서 다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대학 2년때인 지난 2004년 11월부터 권투를 시작한다. 탁구는 순발력과 날카로운 시야를 가져야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다는데서 권투와 일맥상통 한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운동을 하다 지치거나 힘이 들면 그는 인천대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취미로 대풍체육관을 찾았다가 이정국 관장을 만난것도 박지현이 세계챔피언이 되는데 큰 몫을 했다.

뛰어난 기량의 선수와 훌륭한 지도자가 의기투합, 불과 1년 6개월만에 세계챔피언이란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권투를 시작한지 불과 5개월 만인 지난해 4월 그는 대전에서 열린 동양타이틀전 오픈게임으로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전에서 고경희를 맞아 당당히 1회 KO승을 거두고 박은 프로무대에 신고를 했다.

한달 후 열린 2번째 경기에서도 박지현은 상대를 2회 KO로 꺾었고 7월에는 한국 챔피언 오수연마져 KO로 누르며 당당히 한국 챔피언에 등극한다.

현재까지 유일한 패배는 슈퍼 플라이급 이화원과의 경기.

상대가 없어 3개월간 경기를 치루지 못한 박지현은 결국 3체급 위의 이화원 선수와 그해 10월 시합을 치뤘다. 게임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결국 체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판정패, 유일한 패배를 기록하며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실감한다.

올 1월에는 국제 무대에 진출, 필리핀의 강호 라쟈 스네이크 상고에게 4회 TKO승을 거두고 세계챔피언의 발판을 마련한다.

결국 지난 달 20일 열린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 그녀는 챔피언에 오르며 자신의 뜻을 실현한다.

▲여자 프로복싱과 격투기계의 변화
70~80년대 프로권투는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스포츠였다.

레슬링과 함께 권투는 변변한 볼거리가 없던 그 시절 생활고에 찌든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복싱이 시대 변화와 함께 사라지고 이제는 여자 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국제복싱협회(IBA), 국제여자복싱연맹(IWBA), IWBF(국제여자복싱협회)에 이어 WIBA(세계여자복싱협회) 슈퍼 미들급 등 4개 기구 통합 챔피언인 라일라 알리(무하마드 알리의 딸)와 ‘얼짱 복서’로 알려진 한국의 김주희 등 많은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중국, 일본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고 국내에선 100여 명의 선수들이 챔피언을 꿈꾸며 열띤 훈련을 하고 있다.

이정국 관장은 “K-1, 프라이드 등 이종격투기의 그늘에 가려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복싱의 활성화가 시급하다”며 “현재 국제무대에선 남성보다 여성복서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시민들이 권투 경기장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연습벌레 박지현과 그의 미래
대풍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박지현은 새벽 5시 산악 구보와 로드웍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후 체력과 전술훈련은 물론, 실전 스파링 6~8회전 등 6시간이 넘는 맹훈련을 거듭하며 구슬땀을 쏟아낸다. 남들은 그를 연습벌레라고 부른다.

박지현은 “권투는 내 적성에 잘 맞는다. 여자가 무슨 권투냐? 하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나를 믿어주는 부모님의 후원이 있어 든든하다”며 “세계적인 여자 복싱선수가 돼 부모님에게 보답하겠다. 또 기회가 되면 IFBA는 물론, 세계여자복싱협회(WIBA) 등 통합 타이틀전을 통해 진정한 최강자가 되는게 꿈이다. 오는 9월 개관하는 삼산체육관에서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차 방어전을 펼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박지현은 현재 세계챔피언이지만 마땅한 스폰서가 없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8, 9월에 있을 1차 방어전을 준비하며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이정국 관장은 “지현이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협찬이나 후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냘픈 목소리와 호리호리한 몸매, 연약해 보이는 박지현이지만 오늘도 인천 서구의 한 복싱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녀의 주먹끝엔 세계를 호령할 기개가 숨어있다. 유중호기자 kappa1217@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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