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을 출발 2시간여를 접어드는데 지도는 중국의 베이징을 지나 내륙으로 깊숙히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암갈색뿐이던 기내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상은 어느새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름철이었더라면 푸른 목초지대였으리라.

700여년전 한반도를 향해 질풍 같이 달렸을 대륙군이 남하하던 루트였으리라 여겨지는 그 길을 반대로 날아 일행은 몽골 땅을 찾아가고 있다.

눈밭을 헤매듯 이리저리 저공으로 날아 마침내 KE-867기는 울란바타르 징기스칸 공항에 삽분히 내려 앉았다.

1월29일. 현지시간으로 하오 4시30분- 이렇게 해서 월드비전 몽골사업장 방문단 일행은 몽골에 도착한 것이다. 현지의 월드비전 직원 감무르와 밤브가 나와있었다.

일행은 장관진(인천시남부교육청장) 공덕환(남부교육청 초등장학사) 박상국(남부교육청 중등장학사) 임철순(동부교육청 초등교육과장) 우인상(동부교육청 중등팀장) 최경석(월드비전 부장) 이진이(월드비전 과장) 정지혜(월드비전 주임) 그리고 기자였다.

이들은 3박4일간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근교의 한국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날라이흐 2지역의 학교와 유치원 그리고 보건소 지역주민 자치센터등을 방문 숙명처럼 여겨지던 가난을 헤치고 일어서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몽골의 국토는 156만㎢로 한반도의 7배가 넘는다. 그러나 인구는 우리 인천시만도 못한 247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공략 군림하던 대국이 오늘날 어찌하다 이렇게 소인국으로 몰락해 있는것일까.

그러나 지금 몽골(Mongolia)은 옛 영화를 다짐하듯 기지개를 켜고 있다. 공산권에서 선두로 70년간의 소비에트식 공산주의 체제를 청산하고 정치 경제 개혁을 단행한 것은 1990년에 들어서였다.우리와의 교류가 열린것도 그때로 부터이다.




울란바타르 중심가의 모습

몽골민족은 우리와는 인종적으로 가장 가까운 같은 몽골리안이다. 우리 처럼 피부색이 같고 우랄알타이어를 구사한다.

문화기행을 다녀온 학자들은 깜짝 놀랄 만큼 우리와 비슷한 풍습이 많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최근의 고구려사 붐이 일기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북방을 외면해 왔듯 몽골도 백안시 했다.

그것은 유학숭배 때문이기도 하고 고려때 몽골에게서 겪은 고초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지난 냉전시대에서는 아예 발길을 디딜수도 없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리상으로도 일본과 중국 다음으로 가까운 나라이다. 이제야 두나라의 새로운 관계가 열려있다.

몽골은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지원이 끊기면서 사회전반에 빈곤이 만연하기 시작했으며 자유경제 체제의 전환기에 있게되는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상태이다.

알콜중독 가정폭력이 급증하고 아동복지가 위협받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벌어져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하루 2$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안전급수를 혜택받지 못하는 인구가 40%에 이른다.

도시로의 유입이 늘어나고 실업률이 40%에 육박한다. 현재 인구의 3분의 1이 도시지역에 거주한다.

울란바타르의 공식인구가 100만명이라고 하나 120만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전체인구의 절반이 수도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여러가지 도시문제가 발생한다.

빈곤으로 가출하여 거리를 헤매는 어린이가 4천~5천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체류중 그런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척박한 주거환경으로 주민들은 질병에서 노출되어 있다.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들은 호흡기 질환등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하수시설이 열악하고 식수를 구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의료시설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자이승 승전탑의 벽화-2차대전시 참전 옹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인데 정상에서 울란바타르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월드비전 사업장이 있는 날라이흐 지역내 실업률도 40%에 달한다. 겨울철에는 일터가 없어 생활비를 빌려 쓰고 여름철 노동으로 돈을 벌어 갚으려니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된다.

이런 과정에서 월드비전의 지원은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실제로 몽골 가정의 절반이 여러나라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특히 그들은 한국의 도움에 고마움을 느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 묘목밭 처럼 되어진 곳에 ‘몽골을 푸르게’라고 한글로 쓴 플래카드가 차창으로 보였다.

우리 손으로 조림을 돕는 것일까. 반가웠다. 거리 곳곳에 한글 간판과 한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심하게 정체 현상을 빚는 자동차의 물결속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거의가 우리 국산 자동차들이다.

중고차를 수입했는지 행선지가 적힌 버스도 보이고 강원도 어느 운전학원의 반트럭도 보인다.

실제로 우리 일행이 체재중 이용한 소형버스도 현대 카운티였다. 한류의 바람도 거샌듯 거리의 간판에 한국 연예인의 얼굴이 자주 눈에 띈다.

일행이 국립역사박물관을 찾았을때 만난 미국계 외국인학교 20여 어린이중에도 두명의 우리 어린이가 섞여있었다. 호텔에 비치된 텔리비전에서는 종일 KBS가 방영되고 있다.

오랜 세월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인들은 친절하고 접대를 잘 하기로 이름나 있다. 누구든 미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센 베노”(안녕하십니까) “바야 를라”(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참으로 좋아한다.

그들은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전통가옥인 조립식 게르를 버리지 못한다. 비교적 넓은 터전에 울타리를 치고 사는데 널판이나 양철 아니면 벽돌담이다.

도난방지 때문이라고 하나 엉성한 담장이 그런 것만은 아닌듯도 한데 울타리 안에는 반드시 게르가 함께 있어 두채의 주택이 되는 샘이다.

도시생활일 망정 향수 처럼 느껴지는 유목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게르를 방문할때는 몇가지 주의점이 있다.
①게르의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된다. 나쁜 운을 묻혀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②게르 안에서 차가 끓고 있을때 내방객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것이라고 믿는다.
③집주인이 음료를 대접할때 거절함은 예의에 어긋난다. 싫더라도 조금 드는척 하면 된다.
④남의 발등을 밟았을때는 악수를 청하며 사과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적이 될수도 있다고 여긴다.
⑤물건을 전할때 던져주면 안된다. 그것은 개에게나 하는 행동이다.




일행이 결연할 어린이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들은 비교적 넓은 대지안에 대개 간이 가옥과 전통 유목가옥인 겔등 두채의 가옥을 가지고 있다.(사진 오른쪽부터 ①최경석 월드비전 부장 ②박상국 남부교육청 중등장학사 ④우인상 동부교육청 중등팀장 ⑤필자 ⑥장관진 남부교육청 교육장 ⑦공덕환 남부교육청 초등장학사 ⑧임철순 동부교육청 초등교육과장 ⑪월드비전 이진이 과장 ⑫정지혜 월드비전 주임)

체류 둘째날 방문한 두곳의 결연아동 가정도 게르였다.

허리를 구부려 들어서면 중앙에 TV가 놓이고 그 오른편으로 장의자 왼편에 2인조 침대가 있으며 중앙에 스토브와 출입구 좌우에 조리대와 세면대가 있다.

석탄과 장작을 집힌 스토브로 제법 실내는 따듯했다. 그러나 도시민의 가난은 긴 겨울과도 관련이 있다.

수입의 25%가 연료비로 지출되는데 하루 1$를 소모한다고 한다. 대로변 곳곳에는 탄광에서 트럭으로 운송해온 석탄을 마대에 담은 것과 우리것의 절반 길이로 묶은 장작다발을 쌓아 놓고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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