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가진 존재들에게 자손을 기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본능이고 의무다.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은 그들의 자손이 스스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 자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스스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기술을 건네주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며 헌신한다.

인간사회의 복잡성 교육에도 예외없어

생명체가 보여주는 현상 중에서 가장 숭고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생명경외의 사상이 생겨난다.

인간들이 자손을 기른다는 내용도 본질에 있어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가 자연계의 그것에 비해 좀 더 복잡한 탓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훨씬 어지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의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얻는데 있어 다른 동물계와는 달리 훨씬 피곤한 우회경로를 거쳐야 한다. 모여 사는 방법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복잡한 조직 체계를 갖는다. 인간들이 자손을 키우는 방법을 만일 다른 동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터무니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의 인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스스로 시비를 거는 유일한 생명체로 변화하였고, 자신의 삶의 가치까지를 회의(懷疑)하는 대단히 위험한 자가면역질환자(自家免疫疾患者)의 모습마저 보이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인간 사회의 복잡성은 인류의 후손들을 교육하는 방법에도 고스란히 전이되고 이제 교육은 인간들이 살아가며 짐 져야하는 가장 골치 아픈 과제의 하나다. 특히 제 자식은 제가 길러야 하는 것이 자연계의 자연스런 법칙이건만 인류는 내 자식을 남이 기르는 학교라는 이상한 제도를 선택함으로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게 되었다.

사실 학교라고 하는 군대병영을 닮은 집합시설에서 교육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최상의 해법이라거나 논리적으로 정답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가 어찌어찌 편의를 좇아 살다가 보니 만들어진 한 시대의 현상이고 다음 시대에는 또 다른 제도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류가 이러한 학교라는 이름의 공동 양육제도를 통해 “존재”의 사회화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된 현상이다.

학교는 이제 거의 전 지구적으로 유사한 교과과정과 보육 제도를 통해 인류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는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인류의 이러한 “자식 기르기”의 획일화는 동시에 많은 문제를 파생시킨다. 바야흐로 인류의 자식 기르기만이, 신비하지도 숭고하지도 않은 모든 나라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인류는 이제 자식 기르기가 귀찮아서 생식을 거부하는 최초의 생명체가 되려는 참이다.

교육내용의 일반화, 간단하지 않아

학교교육이 골치 아파지는 데에는 물론 많은 원인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학교라는 집단적 교육제도를 선택하는 순간 인류의 윤리관, 가치관, 지식 따위 그곳에서 교육되어야 하는 많은 내용들과, 그러한 내용들을 전달하는 방법까지도 사회적으로 일반화하여야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학교에서 교육 받은 내용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일반화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최대의 쟁점으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참고할만한 선행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몇 가지 재정학적인 지식과 컴퓨터를 운용하는 체계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이념의 개입·권력의 수단 안된다

요컨대 재정의 투입량의 적고 많음에 비례해서 학교는 공익적인 가치에 봉사하도록 설계되어야 하는 것이고, 인간들이 사회적으로 공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상식과 교양에 대한 교육이 개별적인 주장과 주의에 앞서 컴퓨터의 운용체계처럼 가장 선행적, 안정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논리적인 순서가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초중등의 교육은 대학의 교육과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바탕을 희게 한 후라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다(회사후소 繪事後素)라고 하였고 가장 많은 사물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물은 무색, 무미, 무취하다.

초중등 교육은 그러한 인성의 바탕을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어설픈 이념이 이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그 마당이 권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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