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선 분열과 패배, 90년 1월 3당 합당에 인한 ‘여소야대’ 국회의 역전이라는 정치적 격변은 민중민주운동 진영의 정치세력화 문제에 논란을 심화시켜 운동권 내 심각한 대립 양상이 지속됐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독자 정치세력화 진영은 백기완 후보를 내세워 후보단일화 및 민주연립정부를 시도한 이후, 92년 민중당 창당과 총선 참여까지 노동자, 민중을 위한 정당 건설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보수 야당을 믿을 수 없으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의식이 그들에게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에게 87년 6월 항쟁 이후 정국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였다.

그러나 독자세력화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한 운동진영은 92년 총선을 앞두고 보수 야당을 포함한 범민주세력의 연대로 ‘민주 대 반민주’란 명확한 구도하에 선거를 치러 민주정부 수립이란 당면 과제를 실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민중당이 독자성만 주장하면서 민주연합전선의 구축을 교란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87년 들어 대중노선을 강조하고 직선제 개헌에 주력했던 NL(민족해방)계와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진전시켜야한다고 표방한 PD(민중민주주의)계가 대립하던 때였다.

당시 인천지역 운동권 내 다수를 점했던 NL계는 독자 세력화에 반대하는 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독자 정치세력화를 지향했던 PD 진영과 대립하면서 갈등도 깊어갔다.

양 진영은 91년 첫 지방(광역)선거, 92년 총선을 꼭지점으로 논쟁 대립하면서, 또 한편으론 후보단일화란 ‘방책’을 통해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92년 3·24 총선을 앞두고 민중민주운동 진영 일부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정당 건설에 매진했다. 92년 3월18일 ‘ILO 기본조약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가 집회를 갖고있다.

▲ 민중의 당, 한겨레민주당의 실험

87년 대선 후 88년 4·26총선을 앞두고 노동, 학생운동 출신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보다 급진적인 ‘민중의 당’이 창당됐다.

서울에서 출마한 정태윤 등과 함께 인천에서는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송경평이 북구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와함께 87년 대선에서 양김 단일화를 추진했던 세력 일부도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후보를 냈다.

제정구 유인태 김부겸 원혜영 등과 함께 인천에서는 대우중공업 해고노동자 출신으로 인해협 회장이었던 오순부(서구) 등 3명이 출마했다.

88년 4월10일 십정동 샘터교회에서 ‘인천지역 민중후보 추대위’, ‘인천지역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 인민노련, 인천 민교련 등의 명의로 ‘민중후보 추대 인천시민대회’가 열렸다.

학생 등 300여명이 모인 이 자리서 참석자들은 민중후보로 송경평, 오순부 지지를 결의했고, 인천시민공동회는 오순부 선거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양당 출마자들은 모두 낙선했다.

▲ 시의원 선거와 야권후보 단일화

91년 6월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운동진영은 3당 합당으로 인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보수연합에 의한 권력 독점에 대한 우려가 깊었다.

기존 야당의 정치적 내용에서도 기대할 것이 없을 것으로 본 운동진영 일부에선 독자적인 후보를 내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지역 연합운동체인 인천민족민주운동연합(인민연) 등의 진영에서는 독자적 후보 출마가 이미 분열돼있는 야당에 더하여 분열상의 심화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다.

양 진영이 선택한 것은 선거구별로 친여 후보에 대항하는 단일한 야권후보를 내는 것이었다.

각 운동진영은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단일한 선거운동을 조직할 수 있도록 민중당이 소속된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했다.

1990년 11월 인민련이 먼저 인천지역 사회단체와 정당들에 공식 제안했다.

당시 평민당과 민주당 인천시지부가 여론을 받아들여 결단을 내렸다. 91년 1월31일, 인천지역 운동진영과 두 야당은 3자 공동으로 야권후보를 단일화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이날 발표에서 3자는 몇가지 원칙에 합의하면서 인천지역 야권 단일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김병상 신부, 임석구 목사, 임명방 교수, 김승묵 변호사, 홍성훈 원장 등 각계 대표 인사와 한영수, 명화섭 양당 인천시지부장, 이진 실무집행위원장 등 8명으로 구성했다.

범민주후보 단일화 공동대표는 김병상 신부, 박영숙 평민당 최고위원, 명화섭 민주당 인천시부장이었다.

이후 구체적인 단일화 작업이 추진되면서 4월25일 27개 선거구 중 평민당 9, 민주당 9, 민중당 2, 재야 7명씩 후보를 배분하고 지역구별 후보자를 발표했다.

구두선에 그치리라 여겨졌던 단일화 작업은, 일부 이탈자가 있었지만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시 야권후보 단일화는 보수야당과 민중당, 그리고 당시 재야로 통칭되던 인천지역 시민사회운동 단체를 포함하는 명실상부한 야권통합이었다.

선거 당시 인천에는 국회의원 7인 모두가 여당 의원이었다. 그리고 단체장 선거가 없던 91년 최초의 광역의원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높았다.

위원회는 5월27일 부평1동 신협회관에서 단일후보 추천자 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면서, 후보단일화 정신을 홍보전략의 중심에 놓고 공통로고, 공통홍보물을 제작했다.

범야권 단일후보들은 6월13일 중구 가톨릭회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8개항의 공약을 발표했다.

△공권력 투입 때 시의회 승인을 거치도록 입법한다 △지역방송국 유치 △불합리한 학군배정 조정 및 열악한 교육환경개선 △산업전용도로 건설 △환경지청 신설 △직장탁아시설 및 민간비영리 탁아소 지원 △민중생존권 확보 등이 그것이다.

6월20일 선거 결과 여당 20명, 야권단일후보 6명(재야 추천 2명) 무소속 1명이 각각 당선됐다. 야권으로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전국적인 야권 패배, 여당이 지배하던 인천의 정치환경을 고려할 때 6석은 선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 14대 총선과 민중당 창당

노동자, 민중의 당을 위한 독자세력화 진영의 진보정당 건설은 92년 3·24 총선을 앞두고 본격화됐다.

그 진원지는 인천지역 노동운동 진영이었다. 89년 9월 전국 조직 준비를 위해 지도부를 교체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90년 들어 비공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준비위원회(한사노) 결성을 준비하면서 그간 교류해오던 전국 20여개 지역의 지하조직을 통합했다.

이즈음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운동권에 큰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정당 건설에 대한 논의가 본격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 91년 9~10월에 걸쳐 합법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과 이에 따른 전위조직 노선 폐기, 혁명노선 포기 등 신노선으로 중요한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92년 1월 창당된 한국노동당은 민중당과 통합해 총선을 치렀으나, 진보 정치의 원내 진입은 민주노동당 창당과 2004년 총선까지 12년을 기다려야 했다.
지도부는 신노선을 놓고 전 조직원 투표를 실시한 결과 90%의 찬성으로 합법 정당의 길을 걸었다.

인민노련은 이를 토대로 12월 한국노동당 준비모임으로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노정추)를 발족했다.

92년 1월15일 노정추는 한국노동당창당추진위원회 인천지역 발기인대회를 가진데 이어 1월19일 서울 한국종합전시장에서 27개 지역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노동당(한노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인천민중연합 황선진 의장은 이 때 한노당에 합류했다. 인천민중연합은 91년 12월 한국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방침을 놓고 ‘총선 전 공식 통합’과 ‘정당 참여는 좌파세력 결집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이 논란은 총선 후 92년 5월 총회에서 양측의 공식적인 분리를 가져왔다.

한편 총선을 앞두고 한노당은 1월 민중당과 통합, 당명을 민중당으로 했다. 민중당은 90년 11월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등을 중심으로 창당하고 국민연합에 가입해있었다.

통합 민중당은 92년 총선에서 송경평(북을), 전희식(북갑), 황선진(서구), 박귀현(남동), 이원주(중동옹진) 등 인천 5개구에 후보를 공천했다.

한편 총선을 민주 대 반민주 대립구도로 승리를 이끌어 민주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진영은 독자적 정치세력화 진영과 대립했다.

인민련을 주축으로 재야인사 50여명은 ‘민주정부 수립과 범민주 후보단일화를 위한 인천시민회의’를 발족시켜 91년 지방선거에서 처럼 범민주 후보단일화 작업에 나섰다.

총선에서 민주진영의 패배는 정권에게 내각제 개헌의 빌미를 주고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여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야당에게 금전 공천, 낙하산식 공천을 지양하고 범민주세력과의 연대에 적극 나서라고 촉구하는 한편, 민중당 등 독자적 민중정치 세력이 ‘민주 대 반민주’의 명확한 대립구도를 깨고 민주진영의 분열을 초래할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그러나 단일화 작업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따라 인민련은 자체적으로 인천지역 ‘범민주 후보’ 7명을 선정해 92년 3월12일 발표했다.

당선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선정한 ‘범민주 후보’는 민주당 후보 6명과 민중당 후보 1명이었다. 선거 결과 당선된 ‘범민주 후보’는 민주당 소속 1명뿐 이었다.




92년 총선에서 패배한 민중당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의지를 살려 ‘진보정당창당추진위’로 전환하고 그해 대선을 앞두고 백기완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민중당 후보는 전원 낙선해 정당법에 의해 해산됐다. 해산된 민중당은 이 해 4월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의지를 되살려 ‘진보정당창당추진위’(진정추)로 전환하고 10월, 대선을 앞두고 백기완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이후 민중진영은 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이를 기반으로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를 승계해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2004년 총선에 이르러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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