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한(北韓)이라는 용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새삼 대한제국의 작명과정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이 자리에서 더듬어보지 않더라도 “북쪽의 대한민국”이라는 뜻을 축약한 듯한 이 괴이한 명사를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국내의 논리에 의한다면 우리 헌법은 한반도의 휴전선 이북지역을 반국가단체가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만큼 이 용어를 남한이라는 용어와 병치해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고, 국제적으로는 대체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이나 “north KOREA”로 불리고 있어 이에 대한 번역어로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남북 유엔동시가입때도 명칭고민의 흔적이

이러한 사실은 1991년에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앞두고 작성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되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해서 남북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 고민스러움을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연유에 대해 딱 부러지는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피식민(被植民)과 분단의 한을 담아 한반도의 북쪽도 같은 한민족의 땅이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대한민국의 동포라는 인식이 우리사회에 보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에 반해 북측에서 사용하는 “남조선”이라는 호칭은 우리가 사용하는 “북한”이라는 명칭에 비해 대단히 전투적이다. 그들의 경우에는, 남북한이라는 표현까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의 경우와 달리 그들 스스로를 북조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한반도의 지도에는 38군사분계선조차 표시하지 않아 “남조선의 임시성(臨時性)”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주체가 되는 조선 통일론을 노골적으로 선전한다.

북측 참가에 목 매는 조직위 안쓰럽기도

남과 북의 문제라는 것이 이렇게 서로 마땅한 호칭조차 정하지 못할 정도로 간단치 않다. 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한마디로 쉽게 “같은 민족”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을 만큼 남북 간에는 이미 많은 괴리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 괴리가, 같은 게르만이면서도 통일을 꿈꾸지 않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다는 것이야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같은 아랍민족이지만 결코 합치지 못하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간극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시안게임 개막 200여일을 앞두고 조직위가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아시안게임이 아시아지역의 정치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야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해보아도, 1951년 뉴델리의 제1회 대회 이후 60여 년간의 아시안게임 덕분에 이 지역의 국가들 간에 더욱 돈독한 평화가 자리를 잡았으며, 그동안 아시안게임을 치른 도시들은 대회 이후 모두 외국 투자가들이 몰려들어 대박이 터졌다든지, 그래서 4회나 이 대회를 주최한 방콕이 아시아 제1의 도시가 되었다든지, 서울과 부산 두 번의 개최 경험을 통해 우리도 엄청난 재미를 봤다든지 하는 데에 선뜻 동의할 인사들은 국내외에 많지 않을 것 같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북측 선수단의 참가에 목을 매는 듯한 조직위의 행보가 더욱 안쓰럽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OCA의 회원국이니 그 권리와 의무에 따라 스스로 참가 여부를 결정하면 될 일이고 우리는 OCA의 규정에 따라 주최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될 텐데…,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특별하게 대접 받아야 하는가.

통일은 우리내부의 세월에 대한 인내를 요구

우리는 이미 2002년 9월에 부산 아시안게임 때와 2005년 인천에서 개최된 아시아육상선수권 대회에 그들 선수단과 응원단의 참가를 경험하였다.

2005년 인천대회 때는 북측 선수 1인당 무려 1억 원의 재정비용을 들여 불러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누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들의 참가 덕분에 한반도의 평화 수준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가 달라지거나 남북 간의 우호가 훨씬 깊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다.

한반도의 평화지수는 대한민국의 강력한 국력의 확보와 북측 수뇌부의 변화, 주변 강국의 안정적인 세력균형의 달성에 의해서만 높아질 수 있다는 명백한 상식을 덮어두고, 가뜩이나 빈 곳간에 또 한 번 정치적 선동을 위한 대규모 낭비가 이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통일은 우리에게, 우선적인 우리 내부의 통합과 변화를 만드는 세월에 대한 인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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